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싼타페 Jul 16. 2020

# 편지 셋 - 인연에 대하여

    난 인연이란 말은 그닥 좋아하지 않소.  인연이란 말은 시작할 때 하는 말이 아니라 모든 것이 끝날 때 하는 말이기 때문이라오.  많은 이들이 처음 혹은 몇 번 되지 않는 만남에서 인연이라고 말들 하지만 이내 아닌 것이 되어버리곤 하지 않소.  그것은 상대의 환심을 사기 위한 수사적 표현일 뿐이라오.  전생에 삼천 번의 스침이 있어야 이생에서 한 번의 만남이 있다는 말은 만남을 소중히 여기라는 의미로 받아들여야 옳을 것이오.       


    작은 어려움을 마주 할 때 인연이 아니라고 여긴 이는 이내 포기하고 뒤 돌아 갈 것이며, 인연이라 여긴 이는 끝내 이겨내지 않겠소.  인연이라면 노력하지 않아도 이어질 것이고, 인연이 아니라면 제 아무리 노력해도 안 되는 것이라 하는 말은 참으로 무책임하오.  결과를 미리 예측하고 처음부터 시도조차 해보지 않거나 노력을 기울이지 않는다면 이처럼 어리석은 짓이 또 어디 있겠소.  그렇기에 인연이란 서로에 대한 무한한 신뢰를 기초하여 쌓아가야만 하는 것이오.     


    살다보면 어찌 맑은 날만 있겠소.  흐린 날도 있을 것이고, 궂은 날도 있을 것이오.  그럴 때마다 서로 인연이 맞는지 따져 묻는다면 실로 한심한 노릇일 꺼요.  우리 역시 많은 시간들 속에 많은 기쁨만큼이나 많은 아픔도 있지 않았소.  그럼에도 서로에 대한 의지를 놓지 아니하였기에 지금까지 온 것 아니겠소.  힘들고 어려울 때마다 소리 없이 잡아주던 손은 아무 힘도 없지만 그 안에는 우리 앞에 놓인 고비들을 넘어갈만한 힘들을 내포하고 있었다오.  어려움을 홀로 감당하지 말고 함께 해보자는 의지의 표현이었다오.  철없어 매번 넘어져 어찌할 바를 모르던 내게 내밀던 그대 작은 손은 그대 의지의 표현이었고 나를 일으키게 하는 힘의 발원이었소.     


    언젠가 멀쩡하게 잘 다니던 직장을 때려치우고 사업을 한답시고 돌아다니다 결국 다 말아먹고 집에 돌아와 의기소침해 있던 내게 그대는 말없이 곁에 앉아 내 손을 잡아 주었더랬소.  이 사람이 왜 이러나 하는 표정으로 쳐다보니 그대 싱긋이 웃으며 당신을 믿어요 하며 쥐던 손에 살짝 힘을 주었더랬소.  그때 왜 그리 그대가 크게 보였는지, 왜 그리 의지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치는지 한편으론 부끄럽기도 하고 한편으론 든든하기도 하였더랬소.  내가 이리 살아온 것은 어쩌면 그대의 힘인 것 같소.     


    그대를 만남은 우연이나 인연이 아닌 그대 향한 나의 의지의 발현이었소.  그대를 사랑하겠다는 의지요 그대를 안겠다는 의지이며 그대를 지켜주겠다는 의지였다오.  그 의지가 내 발걸음을 그대에게로 향하게 하였고, 그대 앞에서 서게 했으며, 그대 곁에 있게 하였소.  또한 그 의지로 서로의 시간을 공유하도록 하였소.  그러한 나의 의지는 신께서 심어 놓으신 본능이오.  나는 그저 본능에 충실하고자 하였고 그 본능이 나로 그대에게 다가가도록 한 것이오.  나의 의지는 본능을 거스르는 것이 아니라 본능에 충실한 것이오.     


    허나 그것뿐.  그대를 지켜주겠다는 다짐은 험한 세상의 파고에 힘없이 바스라 져버려 한 줌 부스러기가 되어 부끄러움에 못 이겨 주머니에 숨어 버렸소.  그대와 공유하고자 했던 시간들은 혼자 서있기도 힘들만큼 형편없이 쪼그라들어 버렸지만 그래도 그대가 붙잡아 주던 손길들이 있기에 나는 거기 있을 수 있었소.  그대를 안겠다는 열정은 어느새 세월이 좀먹어 흐물흐물해져 버렸지만 그대가 대신 안아주니 나쁘지 않더이다.     


    한 줌 꺼리도 안 되는 이유로 화를 내며 싸우던 때면 언제나 밖으로 나가 배회하며 술로 풀곤 했던 나를 엉망이 되어버린 방을 묵묵히 청소하며 나를 위해 기도해주던 그대였다오.  일이 잘 풀리지 않아 잔뜩 취한 채 들어와 방으로 들어가는 나를 잡고 수건에 따뜻한 물을 묻혀 닦아주고 꽤나 무거웠을 나를 이리저리 뒤집어가며 잠옷으로 갈아입혀주고 자다가 미친놈처럼 욕을 하며 잠꼬대를 하기라도 하면 내 가슴을 토닥이며 작은 소리로 기도해주곤 했었다오.  눈물을 흘리며 말이오.  간혹 취중에도 제정신은 들기도 하여 그대가 어찌 나를 보살펴주었는지 알게 되었다오.     


    어머니 돌아가시던 날, 북받치는 감정에 휘둘려 미친놈처럼 울부짖으며 통곡할 때 곁에서 함께 슬피 울어주던 그대가 있어 나는 견딜 수 있었다오.  슬픔에 싸여 잠을 이루지 못하고 베겟니만 적시고 있을 때 가만히 안아주던 그대의 품은 어머니의 그것이었다오.  그 밤 그대 품에 안겨 잠들 수 있었고 꿈결에 어머니께서 빙긋 웃으시며 잘 되었다 하시더이다.  처음엔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신 것인지 몰라 한참을 머릿속에서 붙잡고 있었는데 한 세월 흐르고 아이들 출가 시키니 그제야 알겠더이다.  결혼식 끝나고 인사하는 아이들에게 축복하며 해주었던 말이 잘 되었다였소.  둘이 만나 결혼하였으니 잘 되었다, 둘이 참으로 잘 어울리니 잘 되었다, 앞으로 둘이 두 손 꼭 잡고 앞 날을 헤쳐 나가게 되었으니 잘 되었다며 그리 축복해 주었는데 그것이 당시 어머니의 마음이었나 보오.  그대 내 곁을 지켜주니 잘 되었다며 그리 떠나시는 어머니의 마음이 흐뭇하셨을 것이오.     


    그러고 보면 우리가 인연은 인연인가 보오.  그 숱한 시간들을 지나고 헤아릴 수 없는 고비들을 지났지만 돌이켜보면 즐거웠던 순간들이 더욱 많고 행복했던 순간들이 더욱 많으니 말이오.  무엇보다 그대 향한 내 마음이 지금도 이토록 뜨거운 것을 보니 더욱 그리 여겨지오.  그대를 참으로 많이 사랑하오.          



매거진의 이전글 # 편지 둘 - 내 안에 들어온 그대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