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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근영 Feb 03. 2020

만두의 위로

마음이 흔들릴 때는 따뜻한 음식을.

 오늘따라 날이 추웠다. 옷깃을 꽁꽁 여미어 봐도 몸에 한기가 돌았다. 배가 헛헛해서 그런 걸까, 따뜻한 음식이 고파서 만둣집에 들어갔다. 주먹 반만 한 찐만두 다섯 개를 시켰다. 그동안 꽤 오래 만두가 먹고 싶기도 했거니와, 모락모락 솟아오르는 김에 매끈한 만두피가 절로 침을 꿀꺽 삼키게 했다. 나는 오랫동안, 천천히 만두를 꼭꼭 씹어 먹었다. 만두의 꽉 찬 속이 비어 있던 배를 든든하게 채웠다. 몸이 조금씩 데워지는 것 같았다.


 그러나 만둣집을 다시 나와 차가운 겨울 공기 속으로 들어갔을 때 비로소 헛헛한 것은 내 배가 아니라 내 마음임을 알았다. 아니, 실은 몸에 그토록이나 한기가 돌던 것은 비어 있는 나의 마음 탓임을 알고 있었다. 나는 그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추운 길을 걸어 집으로 돌아갔다.


 며칠 전부터 다시 불안이 내 마음을 뒤흔들고 있던 차였다. 작년 말에 직장을 그만두고부터, 불안은 썰물과 밀물처럼 나를 삼켰다가 또 뱉어내기를 반복했다. 내 인생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까? 다른 길을 가기 위해 편입을 해야겠다고, 나름의 계획을 세웠다고 생각했다. 충분히 각오하고 준비했다고도 생각했다. 하지만 나는 그리 단단하지 못했나 보다. 틈만 나면 불안에 침식되는 나를 나조차 어쩌지 못했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은 어쩌면 인생의 흐름 속에서 순응하며 살아갈 뿐이라는 생각이 들어, 그 생각으로 내 마음을 가만가만 다독여 왔었다. 


 그런데 실은 나는 순응한 것이 아니라 내가 기대한 바대로 내 삶이 흘러가리라 생각하고 있었던 듯, 편입 지원을 한 대학교 중 한 군데에서 불합격 통보가 나자 내 마음은 다시 거친 격랑 속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당연히 3월에는 다시 어딘가에 소속될 것이고 따라서 그리 불안해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만약에 편입을 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해 세워두었던 계획도 그 순간에는 아무런 위로가 되지 못했다. 계획한 대로 삶이 흘러가지 않더라도 충분히 의미 있는 순간을 보낼 수 있다고 생각해 왔던 것이 와르르 무너졌다. 바람 앞에 흔들리는 등불처럼 내 마음은 불안 앞에서 속절없이 흔들렸다.


 나는 그 거대한 불안에서 벗어나기 위해 잠을 잤다. 이틀간 죽은 듯이 잠에서 깨어나질 못했다. 나는 그것이 나의 불안을 잠재울 수 있는 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날 만두를 먹고도 채워지지 않는 마음을 부여잡으려, 나는 다시 잠을 청했다. 두어 시간쯤 잤을까, 눈을 떠도 불확실한 미래에 대한 불안은 여전했다. 


 나는 갑자기 깨달았다. 잠을 자도 내 불안이 해소된 적은 없었다는 것을. 무의식의 세계로 도망치는 것은 나와 불안 사이의 길을 잠깐 막아줄 수는 있어도 그 불안을 사라지게 할 수는 없다. 나는 내 불안을 해결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어딘가 눈에 보이지 않는 곳에 던져두고만 있었던 것이다. 불안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이려 하지 않고 그저 피하려고만 했다. 


 문득 새해 첫날에 꼭꼭 마음에 새겨두었던 나태주 시인의 시가 생각났다.


새해인사 / 나태주


글쎄, 해님과 달님을 삼백예순다섯 개나
공짜로 받았지 뭡니까
그 위에 수없이 많은 별빛과
새소리와 구름과 그리고
꽃과 물소리와 바람과 풀벌레 소리들을
덤으로 받았지 뭡니까

이제, 또다시 삼백예순다섯 개의
새로운 해님과 달님을 공짜로
받을 차례입니다
그 위에 얼마나 더 좋은 것들을
덤으로 받을지 모르는 일입니다

그렇게 잘 살면 되는 일입니다
그 위에 더 무엇을 바라시겠습니까?

      

 나태주 시인의 시를 읽고 알게 되었었다. 실은 우리는 새해마다 삼백예순다섯 개의 엄청난 선물을 받고 있었다고. 그리고 그 하루하루를 기민하게 알아차리는 것만으로 수많은 덤으로 내 순간들을 채울 수 있다는 것을. 그 순간 우리의 모든 시간은 기쁨이 된다. 


 나는 불안으로 떠는 이틀 동안 내도록 잠을 자기만 했다. 나는 잠에 빠져 있는 이틀 동안 그 무엇도 알아차리지 못했고 그 어떤 덤도 얻지 못했다. 심지어 공짜로 받은 해님과 달님도 살펴보지 못했다. 그러니 올해의 마지막에 되돌아보았을 때 이 이틀은 백지로 남아있을 것이다. 


 앞에서 깨달았던 것을 가만히 곱씹었다. 내가 불안한 마음을 잠재우는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잠은 실은 내 삶을 수많은 의미로 채울 수 있는 기회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불안을 해소하는 방법이 아니라 불안으로부터 도망치는 방법이었다. 나의 불안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였더라면 불안으로 가득 차 있던 공간에 다시 더 많은 좋은 것들을 받아들일 수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틀의 시간을 아무것도 얻지 못한 채 흘려보내기만 하고 있었던 것 같았다. 새해가 되어 받은 귀한 선물을 두 개나 열어보지 못했다. 앞으로 남은 선물들은 매일매일 소중하게 열어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내 미래는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오늘의 하루를 소중하게 살아야지. 그렇게 마음 먹었다. 소속되지 않아도 괜찮아.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아도 괜찮아. 그 순간을 다른 덤들로 가득 채우자. 


 문득, 헛헛한 마음을 채워주지 못했다고 생각했던 다섯 개의 만두가 나에게 위로가 되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만두를 천천히, 꼭꼭 씹어먹었던 것은 불안에 떨며 이틀 동안 던져놓았던 나의 마음과 몸을 소중하게 대접해주는 것의 시작이었던 것 같다. 앞으로 다시 마음이 흔들릴 때는 맛있는 음식을 먹고 따뜻한 차를 마셔야지. 그러면서 내 마음을 알아차리고 받아들여 주어야지. 힘들다는 이유로 외면하고 회피하지 않으리라. 힘든 순간도 받아들여야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그렇게 해야 우리 삶을 좋은 덤으로 가득 채울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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