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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근영 Jan 27. 2020

겨울나무

삶의 무게를 내려놓지 못하고 있는 당신에게

 엄마와 아빠와 함께 통도사 백련암에 갔다. 찻자리에 쓸 물을 뜨러 간 것이다. 백련암의 산수는 물이 좋기로 유명하다. 차맛은 정성을 들인 만큼 그 보답을 해준다. 그 정성을 들일 만큼의 여유를 갖게 된 것이 기꺼웠다.


 차에서 내리니 부슬부슬 비가 흩날리고 있었다. 하늘은 흐린 잿빛이었고 공기가 축축한 것이 안개 속을 헤치고 걸어가는 느낌이었다. 암자 마당으로 올라가니 몇 달 전만 해도 없던 강아지들이 왕왕 짖어대고 있었다. 미처 덜자란 모습으로 씩씩하게 짖어대는 것을 보니 왠지 모르게 흐뭇한 마음이 들었다. 얘들아, 너희들 참 귀엽고나. 속으로 중얼거리며 조심스럽게 손을 뻗었다. 강아지들은 더욱 세차게 왕왕 짖어댔다.


 “대범이, 건강이, 너희들 지금 뭐하노!”


 결국 건물 안쪽에서 보살님 한 분이 나오셨다. 강아지들 이름이 대범이와 건강이인가 보다. 대범하고 건강해서 지어진 이름일까, 대범하고 건강하라고 지어준 이름일까? 나는 두 녀석에게 조금 더 다가갔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대범이는 왕왕 짖어대며 왕 한 번에 한 걸음, 왕 두 번에 두 걸음 뒤로 물러나고 있었다. 대범하지 않은 것이 분명했다. 대범하고 건강하라고 지어준 이름인가보다. 나는 그렇게 결론지었다. 쪼그리고 앉아서 계속 손을 내밀고 있다 보니 호기심이 더 많은 것인지 건강이가 내게 다가왔다. 등을 조심스레 쓰다듬어주었더니 왕왕 짖어대며 나를 경계하던 태도가 거짓말처럼 갑자기 격한 몸짓으로 나를 반겼다. 언니인 건강이가 그러고 있으니 대범이도 덩달아 난리였다. 조금쯤 감당할 수 없는 기분이 되었지만 나름 열심히 번갈아 두 녀석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러고 있기를 잠깐, 곧 엄마 아빠가 법당에서 나오셨다. 두 사람의 발걸음에 마당에 깔린 자갈들이 자그락 자그락 소리를 냈다. 멈춰선 엄마는 비스듬히 서서 한 곳을 바라보고 있었다. 암자 지붕 위로 뻗은 겨울나무였다.



 엄마는 겨울나무가 참 좋더라.
지고 있는 것을 다 내려놓은 게 근심 걱정을 다 벗어던진 것처럼 후련해 보여.



 나도 겨울나무를 보았다. 엄마의 말대로 겨울나무는 모든 것을 벗어던진 듯 후련해 보였다. 모든 걸 내려놓은 채 편안하게 가지를 뻗고 있었다. 봄날의 싱그러운 생기도, 여름날의 찬란한 영광도, 가을날의 화려한 색채도. 사람들이 감탄해 마지않았던 그 모든 것을 내려놓고 고요한 모습으로 그저 서 있었다. 조금의 아쉬움도 없이, 그렇게. 





 문득 나 자신을 돌아보게 됐다. 나는 나무처럼 지나가는 계절에 순응하지 않고, 잔뜩 욕심을 부린 건 아니었을까. 실은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봄날의 생기와, 여름날의 영광과, 가을날의 색채를 모두 놓지 않으려 아등바등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는 아마 그 온갖 것이 뒤섞여 봄날처럼 싱그럽지도, 여름날처럼 찬란하지도, 가을날처럼 화려하지도 못했을 것이다. 다 부여잡으려고 지나치게 애를 쓰며 일그러져 있었다. 봄이 가면 여름이 오고, 여름이 가면 가을이 오며, 가을이 가면 겨울이 온다는 것을 외면하고 살았다. 계절이 바뀌면 으레 그 풍경도 바뀐다는 것을 모른 체했다. 언젠가는 사람들이 찬탄해 마지않는 시기에서 반짝이겠지만, 또 어느샌가는 그것을 모두 내려놓아야 할 때도 있다는 것을 인정하지 못했다.


 자연스러운 흐름을 거스르지 않고 받아들이며 사는 것이 좋다. 나는 잔뜩 무리를 하고 탈이 나고서야 그것을 알았다. 계절이 바뀌면 그전에 가지고 있던 것을 놓고 새로운 것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한다. 나는 지금 겨울을 나고 있다. 반짝이려고만 하는 마음을 내려놓으니 혹독하다고 생각했던 그 겨울도 그저 하나의 계절이 되고 있다. 나는 겨울나무의 모습을 받아들였다. 포기하지 못했던 것을 벗어던지고 후련해졌다. 새로운 것을 받아들일 준비를 하고 있다. 때가 되면 또 봄이 올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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