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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준한 Aug 14. 2020

우리는 아이들을 보호할 수 있을까.

때리는 장면 대신 도망치는 장면으로 가득한 <아직 끝나지 않았다>.

어느 한 커플이 있다. 이별 전부터 심각한 균열이 있었던 커플이다. 결국 어느 날 한 쪽이 견디다 못해 이별을 통보했다. 누군가를 사랑했었다는 건 그 사람의 안녕을 바라는 일이기도 하다. 하지만 자신을 사랑했던 사람은 그 사람의 안녕이 자기 덕분에 존재했던 것으로 받아들인다. 그 사람에 대한 욕심과 질투, 그리고 폭력은 여기서 발생한다.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배경은 어느 사무실 안 판사의 시점에서 시작된다. 딸 조세핀은 이미 18세가 넘어 양육권 분쟁에서 제외되었기에 앙투앙과 미리암은 아들 줄리앙의 양육권을 다투는 중이다. 초반 10분의 분쟁은 이 영화를 마치 법정드라마가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하지만 우리는 사무실 밖에서 달라진 광경을 목격하게 된다. 이때부터 우리는 이 영화가 드라마가 아닌 스릴러영화임을 직감하게 된다.


결국 주말에만 줄리앙과 시간을 보낼 수 있는 앙투안이지만 막상 줄리앙에게는 큰 관심이 없다. 대신 줄리앙을 통해 미리암이 이사한 집과 그녀의 주변 사람들, 그녀의 전화번호를 캐묻는다. 윽박지른다. 앙투안에게 줄리앙은 미리암을 만나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미리암의 집에 들어가 울먹거리며 자신은 이제 변했다고 미리암에게 빌거나 미리암 부모의 집에 찾아가 줄리앙에게 미리암이 있는지 알아내도록 명령한다. 줄리앙에게 줄 선물을 빌미로 딸의 파티장에 찾아와 미리암에게 애원하면서도 ‘나는 이상하지 않다. 이상한 건 너다’라며 윽박지르기도 한다. 그는 괴물이 아니다. 폭력을 선택한, 자기 부모에게까지 외면당한 자신이 가장 불쌍하고 약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모른다.


이 영화는 명백히 가정폭력을 소재로 하지만 때리는 장면은 나오지 않는다. 다만 폭력에서 벗어나려는 장면이 나온다. 영화의 배경인 프랑스에서는 가정폭력을 ‘부부폭력’이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인다고 한다. 즉, 폭력의 피해자는 자식을 제외한 파트너만 해당되고 이조차 ‘정열의 범죄’로 받아들인다. 그렇다면 그러한 환경에서 자라는 앙투안, 그리고 조세핀의 몸에 자라고 있는 작은 아이는 어떻게 되는 것일까. 자비에 르그랑 감독은 폭력적인 환경을 온몸으로 견디고 있는 한 아이, 이제 곧 마주할 작은 아이를 등장시킴으로써 관객에게 가정 내 폭력에 대한 물음을 던지고 있는 듯 하다. 


가정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모두에게 숨겨진다. 계속되는 앙투안의 스토킹에도 미리암이 그를 고소하지 않는 건 그녀가 이미 파괴당하고 마비되었고, 자식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기 때문이다. 영화는 사무실 안 판사의 입장에서 시작되어 미리암의 집을 바라보는 반대편 집 어느 여인의 시점에서 끝난다. 그 사이 미리암은 무력함에 주저앉지 않고 죄책감을 추진력 삼아 끊임없이 벗어나려 한다. 그리고 결국, 목적지에 도착한다. 


미리암의 집에서 폭력을 휘두르던 앙투안을 경찰에 신고한 건 반대편 집 어느 여인이었다. 미리암은 그녀의 시선을 거부하며 문을 닫는다. 가정 내 폭력은 사적인 영역이자 우리가 침범할 권리가 없는 공간인 것인가. 도움은 필수조건인가 필요조건인가. 폭력의 일상화는 그 경계선에서 주변인들이 흔들리기에 사라지지 않는 건 아닐까. 가부장적 아버지 밑에서 자랐음에도 경험을 배제한 체 철저한 증언과 연구를 통해 영화를 제작했던 젊은 감독 자비에 르그랑. 그의 질문을 곱씹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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