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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디조 Feb 13. 2022

기억을 미화시키는 레시피

주말이 되면 나의 천성은 어김없이 제 모습을 발휘한다. 나태함, 게으름 같은 단어로 표현되는 것들이다. 열심히 숨기며 살려고 노력하지만, 여전히 내 안에 있는 가장 강력하고도, 쉽게 떨쳐지지 않는 모습이다. 서울이나 강원도 고향 집에 갈 예정이 없고, 마땅히 수행해야 할 과제도 없고, 그렇다고 약속을 잡고 만날 사람도 없는 창원에서의 주말이면 나는 온종일 누워있기를 자처한다. 보통은 한자리에 누워 넷플릭스와 유튜브 보기, 인스타그램, 네이버 블로그 등의 SNS를 살피며 뒹굴뒹굴 댄다. 화장실을 가야 할 때나 밥을 먹으러 움직여야 할 때만 잠깐 일어났다가, 다시 눕기를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시간을 스스로 만족하면 그만이지만, 주말이 끝나갈 일요일 오후가 찾아오면 어김없이 후회를 한다. ‘책 한 권이라도 읽을 걸, 영어 한 문장이라도 외울걸, 핸드폰이라도 꺼놨다면 SNS 중독에서 조금은 벗어날 수 있었을까….’

그렇지만 결국 내가 보낸 시간이 다시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을 알기에, 지나친 후회 대신 나태했던 시간을 만회하기 위한 의식을 치르기로 한다. 몸의 소리에 집중해 먹고 싶은 음식 찾고, 조금은 느리고 맛이 부족하더라도 손수 요리를 하는 것이 내가 찾은 최고의 의식이다.





주말 저녁 시간엔 나의 소울푸드인 김밥을 만드는 날들이 많다. 냉장고에 항상 갖춰 두고 있는 김밥용 김, 달걀, 양파, 크래미, 당근, 외할머니 표 무장아찌만 있으면 시중에 팔지 않는 근사한 김밥이 완성된다.


김밥을 만드는 방법은 다음과 같다. 가장 먼저 채칼로 당근을 썰어놓는다. (칼질이 서툴기 때문에, 채칼을 이용해 당근을 써는 것이 훨씬 편하고 균일하게 썰린다.) 다 썰어놓은 당근은 고소한 들기름에 살짝 볶아준다. 그다음은 달걀 3개에 잘게 다져놓은 양파와 약간의 소금을 섞어 달걀물을 만든다. 당근을 볶아 여전히 따끈하게 유지되고 있는 프라이팬에 완성된 달걀물을 부어준다. 달걀물이 익어가기 시작할 때쯤, 부드러운 크레미를 중간에 배치한 뒤 두툼하게 말아 계란말이를 완성한다. 그 사이, 김밥용 김 위에 양념하지 않은 쌀밥을 얇게 깔아준다. (양념해야 더 맛이 있긴 하지만, 양념하는 것도 꽤 성가신 일이기도 하고, 하지 않는다고 해서 맛이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느꼈기에 매번 양념되지 않은 쌀밥을 깔아주고 있다.)

계란말이가 어느 정도 식었다면  위에 올려준다. 그옆에 볶아놓은 당근과 무장아찌를 가지런히 놓고, 재빠르게 말아 터지지 않을 정도의 힘으로만 꾹꾹 눌러 마무리한다. 신기하게 김밥말이 없이 말아도  터지지 않는다. 재야의 김밥 고수 같다는 뿌듯함을 느끼며 김밥을 한입 크기로 썰어놓고, 예쁜 그릇에 담아 애인과 가족에게 보낼 인증샷을 찍으면 완성이다.

  

식탁 겸 책상 위에 노트북을 가져와 재미있는 예능을 틀어놓고, 창문에 블라인드를 활짝 쳐놓고, 깊어져 가는 어둠을 잠깐 구경했다가 정성스럽게 썰어놓은 김밥 한 개를 입에 넣고 천천히 맛을 음미한다. 온종일 집에 있어 밖으로 향하지 못하고 몸 구석구석을 짓누르고 있는 무거운 기운은 짭짤한 무장아찌와 식감 좋은 당근, 감칠맛 도는 계란말이가 부드럽게 씹히는 순간, 눈 녹듯 사라지고 맛있는 행복만이 자리한다. 배가 불러올수록 오늘은 어느 하나 아쉬울 것 없이 지나갔다는 착각까지 들게 한다.


몇 주가 지나고, 핸드폰에 가득한 주말 저녁 김밥 사진을 보고 있으면, 그때의 주말은 나를 위해 무언가를 했었던 꽤 괜찮았던 시간으로 자연스레 미화되어 있다.



no1. 계란말이, 당근, 무장아찌 김밥
no2. 깻잎, 당근 김밥
no3. 소불고기 김밥
no4. 당근, 스팸 김밥
no5. 계란말이, 버섯 김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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