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영이에게 나는 무엇이었을까.
초등학교 5학년, 우리 반 구석에 앉아있던 한 여자아이가 있었다. 그 아이는 희여멀건했다. 멀리서도 그녀임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하얬다. 그녀와 친해지고 싶었다. 지금도 왜 친해지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그녀의 흰 피부 때문인 것인지 그냥 구석에 앉아있던 그녀에게 무언가 말을 건네고 싶었던 것인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그냥 그때의 나는 그녀와 친해지고 싶다는 일념 하나에 사로잡혀있었다.
아마도 그 시절 그녀는 나의 첫사랑이었을지 모른다. 첫 우정이었다고 해야 할까. 그냥 그녀와 모든 이야기를 나누고 싶었다. 그녀는 나의 전부가 되었고 등 하굣길 모든 길에 그녀는 어느 순간 나와 함께했다. 나중에는 그녀와 친해지지 않으면 안 될 지경에 이를 정도로 그녀는 나의 모든 것이 되었다.
'안녕! 난 김주디라고 해. 넌 이름이 뭐야?' 결국 그녀에게 말을 걸었다. 그녀는 선뜻 대답해주었다. "난 이이영이야. 반가워" 그녀가 반갑다고 했다. 나를 싫어하지 않는 듯했다. 그랬으면 됐다. 그녀에게 나의 모든 우정을 바쳐도 되겠다. 12살의 소녀는 다짐했다. 겨우 그 작은 말에 모든 걸 걸었다. 그 인사 이후로 그녀는 나의 모든 것이 이 되어버렸다. 이영이와 나는 급속도로 친해졌다. 나는 이영이의 모든 사소한 이야기부터 큰 이야기까지 알고 싶었다.
이영이의 모든 것은 곧 나의 모든 것과 일치했다. 1년간의 하굣길은 이영이의 집이었다. 나는 매일같이 이영이의 집에 놀러 가곤 했다. 이영이의 집은 2층이었다. 겨우 10개의 계단이 있는 곳이었지만 그때는 그렇게 멀게 느껴졌는지 모르겠다. 이영이의 집은 마치 산꼭대기 같았다. 나는 항상 그 집을 올라갈 때면 손과 발을 사용하여 올라가곤 했다. 이영이는 집에서 매일같이 나를 반겨줬다. "주디 야. 네가 우리 집에 온 첫 번째 친구야" 난 그 말에 항상 취해버리곤 했다. 이영이의 짧은 11년 인생 안에 집에 방문한 친구는 고작 나 하나였다.
내 눈에 이영이는 너무나 매력적인 친구였다. 예쁘고 똑똑하고 잘난 친구였다. 이러한 친구를 나만 알기에는 아까웠다. 나는 모든 반 친구들에게 이영이를 소개해줬다. "00야! 내 친구 이영이야. 얘는 너무 공부도 잘하고 똑똑해. 나와는 너무 달라 얘는 모르는 게 없어" 내 친구들은 점점 이영이에게 호감을 느꼈다. 내 예상이 맞았다. 이영이는 너무나 똑똑하고 매력적인 아이였다. 이영이와 친해진지 6개월 만에 존재도 없던 이영이는 2학기 때 반장 후보가 될 만큼 매력적이고 큰 아이가 되어있었다. 나는 뿌듯했다. 모두가 이영이의 매력을 알았다는 사실에 너무나 뿌듯해했다. '이영이는 역시 나만 알만한 그런 아이가 아니야.' 이영이의 매력을 모두가 알게 된 이 순간이 너무나 행복했다.
이영이는 이런 순간들에 항상 나에게 고마움을 표시했다. '너 덕분이야. 너 때문에 애들과 친해질 수 있었어.' 그 말을 들을 때면 또 이영이에게 취해버리곤 했다. 이영이는 매력적이었고 난 그 매력에 도취되어버렸었다. 이영이의 그런 말에는 엄청난 힘이 있었다.
그리고 우리 둘 사이에는 1년여의 시간이 흘렀다. 다른 반이 되었다. 이영이와 나는 교환일기를 시작했다. 서로의 시간이 잘 맞지 않는 틈에 오해가 비집어 들어올 수 있기에 그러한 오해를 풀고자 하였다. 항상 우리는 매일같이 교환일기를 썼다. 일기에는 조그맣게 자물쇠도 걸어두었다. 나와 너만이 풀 수 있는 우정의 매듭이 지어져 있는 느낌이었다. 그 누구도 우리의 우정을 갈라놓을 수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이영이는 나의 전부였고 이영이에게도 나는 전부일 거라 생각했다.
이영이와 나는 2년간 항상 함께였다. 우리의 집 방향은 반대방향이었는데 우리는 항상 서로의 집 방향이 갈라지는 시작점인 전봇대 앞에 서서 2시간을 떠들고 난 후 집에 가곤 했다. 사실 집에 가지 못했다. 서로가 너무 재밌었던 우리는 하루는 이영네 집 앞에서, 하루는 우리 집 앞에서 그렇게 헤어지곤 했다. 2년간 우리는 항상 서로의 집 앞에서 헤어지곤 했다.
중학생이 되고 이영이와 나는 다른 같은 반이 되었다. 서로 너무 기뻐했다. 우리가 잃어버렸던 1년여의 시간 동안을 중학교에서 풀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같은 반에서 같은 교복을 입고 같은 선생님 아래에서 우리는 그렇게 한결같이 지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 날이었다. 선생님은 맘에 드는 친구와 앉게 해 줄 특권을 주었다. 친한 친구끼리 앉을 수 있는 특권을 주었다. 특별한 순간이었다. 나의 친구는 오직 이영이었다. 당연하게도 나는 이영이에게 다가갔다. 하지만 이영이는 나와 앉지 않았다. 이영이는 내가 아닌 다른 친구를 지목했다. 나는 홀로 남았고 결국 홀로 구석에 앉아있었다. 그 순간에도 이영이를 원망하지 않았다. 내가 모르는 무슨 사정이 있는 거겠지. 그 모든 내용을 이영이와 나의 일기에 담았다, "이영아 내가 모르는 무슨 일이 있는 거니?" 하지만 선뜻 건넬 수가 없었다. 왠지 그날 그 일기를 건네면 다시는 이 일기가 돌아오지 못할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이상했다. 그 무언가 이상해졌다. 너와 나의 무언가가 이상해진 게 확실하다. 그게 무엇인지는 몰라도 풀어야 된다. 이영이가 내 곁에서 없어질 것 같다.
이영이에게 어느 날과 같이 교환일기를 건넸다. 이영이는 받아주었다. 받은 게 아니라 받아주었다고 기록해야 맞겠다. 무엇인가 받아주는 느낌이 들었다. 그 순간 느꼈다. '다시는 이 일기가 돌아오지 않겠구나.' 그 날 이후 이영이는 나를 의도적으로 피했다. 밥을 같이 먹지도 않았으며 같이 조별과제를 하지도 않았고 나와 친했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하는 듯했다.
처음에는 내가 무엇인가를 잘못했나 심히 고민했다. 너무나 괴로웠다. 나의 2년은 그렇게 없어졌다. 나에게 이영이는 모든 것이었다. 이영이의 모든 순간에는 내가 있었고 나의 모든 순간에는 이영이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영이와 나는 모르는 사이가 되어버렸다. 한순간이었다. 이영이와 나는 모르는 사이가 되어있었고 마치 우리가 친했던 모든 시간들은 내 기억 속에, 상상 속에 존재하는 한 순간이 되어버렸다.
지금도 이영이가 왜 그랬는지는 알 수 없다. 그 날 이후로 이영이와 나의 사이는 끝이 나버렸고 다시는 이영이와 나는 대화조차 섞을 수 없는 먼 사이가 되어버렸다. 이영이라는 친구는 그렇게 내 기억 속에, 내 추억 속에만 존재하는 허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