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새벽 2시. 바로 눈앞에서 나이트 버스가 떠나갔다. 안내 전광판을 보니 다음 버스 도착은 36분 후. 택시를 탈 수도 있지만 오늘은 왠지 집에 서둘러 들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버스를 타고 차창 밖의 풍경을 아무 생각 없이 바라보며 천천히 집에 가고 싶었다. 그런데 36분을 기다리자니 내 스마트폰의 잔여 배터리량은 1%밖에 안 남은 상태였다(5년이 넘은 아이폰6는 100%로 충전해도 반나절을 못 간다). 스마트폰도 보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서 36분을 기다리는 것은 생각만 해도 지루한 일이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다음 정류장까지 걸어가기로 했다. 다행히 4월 말의 밤공기는 적당하게 부드럽고 포근했다. 다음 정류장까지는 천천히 걸어도 15분이면 충분한 거리였다. 소주와 정종, 그리고 마지막에 마신 맥주가 몸속에서 서로 화학작용을 일으키며 내 정신 상태를 나른하지만 적당히 기분 좋게 만들어 주고 있었다. 이 기분을 즐기며 신선한 밤공기를 마셔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고 생각했다. 다만 배터리가 없어 걷는 동안 음악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 아쉬울 뿐이었다.
늦은 시간대인 만큼 거리에는 사람이 없었다. 도로에도 택시들을 제외하면 일반 차량은 거의 다니지 않고 있었다. 나는 우선 혜화 로터리 근처에 있는 편의점으로 가 생수를 한 병 샀다. 밖으로 나와 물을 한 모금 마시고 정면을 바라보니 혜화 파출소를 중심으로 길이 두 갈래로 갈라져 있었다. 혜화 파출소 오른편으로는 다음 버스 정류장으로 곧바로 이어지는 대로가 있었고, 왼편으로는 주택가를 통과해 성북동으로 연결되는 이면도로가 있었다.
저 이면도로를 마지막으로 걸었던 적은 정확히 기억이 나지는 않지만 꽤 오래전이었다. 최근에는 저 길로 갈 일이 딱히 없었고, 어쩌면 나도 모르게 일부러 저 길을 피했을지도 몰랐다. 저 길은 이제는 아득해진 내 20대의 어느 시간대와 그 시간들을 함께 했던 그녀, 선우를 떠오르게 하는 길이었기 때문이다.
내가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아마도 이미 나른하고 몽롱해진 나의 정신이 내 의지하고는 상관없이 나의 몸을 그렇게 이끈 것일지도 몰랐다. 나는 물을 한 모금 더 마시고 대로변이 아닌 그 이면도로의 초입으로 천천히 걸어가고 있었다. 이 길로 걸으면 적어도 10분 이상은 시간이 더 걸리겠지만 난 이미 그런 것은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난 어느새 이제는 희미해져가고 있던 어느 시간대의 기억 속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2.
장맛비가 지겹게 내리던 7월의 어느 날, 나는 종로의 한 카페에서 아는 누나의 소개로 선우를 처음 만났다. 나는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 그녀의 짙은 검은색 단발머리와 웃을 때 왼쪽 볼에 작게 생기는 보조개가 마음에 들었다. 그리고 그녀도 나와 똑같이 얼그레이 티를 주문하는 것에 속으로 반가워했다. 그날 우리는 많은 대화를 나누면서 서로의 취향이 비슷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우리는 대학로 동숭아트센터에서 혼자 영화 보는 것을 좋아했고(둘 다 영화가 시작될 때 장독대가 있는 정원이 보이던 커다란 창문에 커튼이 닫히는 것을 좋아했다), 필름 카메라로 사진을 찍는 취미를 이제 막 시작하고 있었다(그녀는 니콘의 FM2를 가지고 있었고, 나는 캐논의 AT1을 가지고 있었다. 둘 모두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것이었다). 맥주보다는 소주를 더 잘 마셨고, 양식보다는 한식을 좋아했으며, 특히 평양냉면을 좋아한다는 것은 결정적이었다. 첫 만남 이후 몇 번을 더 만나면서 서로의 취향과 라이프스타일 등에 대해 시간 가는 줄 모르고 긴 대화를 나누었다. 그리고 따뜻하고 굵은 비가 내리던 8월의 어느 늦은 밤 우리는 이미 흠뻑 젖은 운동화를 손에 든 채 맨발로 그녀의 집이 있는 성북동 골목을 걷고 있었고, 그날 나는 그녀에게 사귀자고 말했다. 그녀는 수줍게 웃으며 나의 고백을 받아주었다.
지방에서 올라온 선우는 성북동에서 자취를 하고 있었기 때문에 우리는 대학로에서 자주 데이트를 했다. 그리고 그럴 때면 보통 이 길을 걸어서 그녀의 집까지 함께 가곤 했다. 선우는 이 길을 걷는 것을 좋아했다. 처음 선우가 내 손을 잡고 이 길로 날 데려왔을 때 그녀는 내게 정말 멋진 길을 보여줄 테니 기대해도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사실 이 길을 처음 들어섰을 때 나는 여기가 딱히 예쁘거나 매력적이라는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그저 고급 주택가 사이를 통과하는 한적한 언덕길 정도로만 느껴졌다. 조금은 김이 샌 나의 마음을 눈치챘는지 선우는 나의 손을 조금 더 힘차게 잡아당기며 “이 길의 진짜 매력은 여기서부터야”라고 말하고 나를 언덕 위로 이끌었다. 그리고 언덕 위의 세 갈래 길에서 왼편으로 방향을 틀며 “짜잔!”하고 왼팔을 옆으로 펼쳤다.
“여기가 바로 내가 이 길을 사랑하는 이유 중 하나야.”
“우와.”
나도 모르게 탄성이 나왔다. 그곳에는 길을 따라 고풍스러운 한양성곽이 이어져 있었고 그 반대편으로는 탁 트인 하늘 아래 성북동의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낮은 주택들이 오밀조밀하게 모여서 경사를 따라 자잘한 파도가 넘실거리듯 겹겹이 펼쳐져 있었고, 저 멀리 낮은 산등성이 위에는 낮은 수풀 사이의 웃자란 잡초처럼 높은 아파트가 솟아있었다. 검은 밤하늘 아래에서 도시가 뿜어내는 은은한 빛들이 한데 뭉쳐서 반짝거리며 흡사 은하수가 흐르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감탄하며 그 풍경을 바라보는 것에 그녀는 뿌듯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여기서 바라보는 이 동네가 좋아. 특히 낮보다는 밤에 바라보는 동네가 더 좋고. 여기서는 내가 살고 있는 곳을 포함해서 그 주변이 한눈에 보이거든. 저기 저쯤이 내가 살고 있는 집이 있는 곳이야. 지은 지 30년도 더 되었을 오래된 3층짜리 주택이지. 곧 무너질지도 몰라. 그래도 나름 고지대에 있어서 창문으로 빛도 잘 들어오고 바라보는 풍경도 나쁘지는 않아. 다만 걸어 다니기에는 조금, 아니 많이 힘들어. 사람들이 왜 평지에 있는 아파트에 살고 싶어 하는지 알 것 같아.”
선우는 자신의 집이 있는 곳과 그 주변을 손으로 가리키며 계속 얘기했다.
“나는 여기 이 동네를 걸어 다니며 골목골목에 숨어 있는 작은 카페나 식당 등을 찾는 걸 좋아해. 그렇게 찾은 장소를 여기에 올라와서 어디쯤이었는지 다시 한번 확인해보는 거야. 마치 지도를 보면서 그 위치를 짚어 보는 것처럼 말이지. 그렇게 위치를 확인하고 나면 그 장소는 온전히 내가 알고 있는 장소가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 기분이 정말로 좋아. 그 느낌이 뭔지 알 수 있겠니?”
나는 알 듯 말 듯하다고 답했다. 그녀는 웃으며 말했다.
“너만 괜찮다면 앞으로 우리 같이 동네 탐험을 해보자. 너도 분명 좋아하게 될 거야.”
그 날 이후로 우리는 그 길을 걸을 때면 거기에서 많은 시간을 보냈고, 그만큼 많은 추억들도 만들었다. 선선한 바람이 부는 가을밤에 달빛 아래서 첫 키스를 한 곳도, 내가 아이팟에 담아온 음악을 서로의 귀에 한쪽씩 꽂은 이어폰으로 들었던 곳도, 사소한 말다툼으로 선우를 처음 울렸을 때 미안하다고 말하며 그녀를 안아준 곳도 그곳이었다. 그리고 유난히 추웠던 겨울이 지나고 어지럽게 부는 바람에서 희미하게 봄기운이 느껴지던 3월의 어느 날 우리가 이별했던 장소도 그곳이었다.
이별에 특별한 이유는 없었다. 적어도 내가 생각하기에는 그랬었다. 우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쳐 어떤 단계를 넘지 못한 채 정체되어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같이 대학로에서 밥을 먹고 차를 마셨다. 그리고 그러는 중에도 우리는 오늘이 마지막이 될 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차를 마시고 나와서는 그렇게 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우리는 혜화 파출소 옆길로 들어가 성북동으로 향하였다. 나란히 걷고는 있었지만 서로의 손은 각자의 외투 주머니에 넣은 채였고 아무 말 없이 앞만 보며 걸어갔다. 그리고 언덕 위에 도착했을 때 우리는 그동안 하기 싫어서 미뤄두었던 숙제를 해 버리듯 급하게 이별을 했다. 선우가 먼저 나에게 이제 그만 만나자고 얘기했고, 나도 그렇게 하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대답했다. 우리는 거기서 헤어져서 선우는 자신의 집 방향으로 내려갔고, 나는 올라왔던 길을 다시 내려가 혜화 로터리로 향했다. 우리의 뒤로는 한양성곽만이 묵묵히 서 있었고, 저 멀리 성북동의 야경이 여전히 조용하게 반짝거리고 있었다.
3.
천천히 걷다 보니 나도 모르게 그 장소에 도착했다. 예전에 비해 크게 달라진 건 없어 보였다. 성곽의 커다란 돌들이 조금 더 빛바랜 듯 보였으며, 성북동에는 예전에 없었던 새로운 건물들 몇 채가 낡은 건물들 사이에서 이따금 비죽비죽 솟아있을 뿐이었다. 아마 그동안 달라진 건 나뿐일지도 몰랐다.
성북동 쪽을 바라보며 선우가 예전에 살던 집에 아직도 살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리고 선우와 함께 동네 탐험을 하며 발견했었던 작은 카페와 식당들이 아직도 남아 있을지도 궁금했다. 그녀가 아직 이 동네에 살고 있다면 지금도 골목골목을 돌아다니며 새로운 장소를 찾고, 여기에 올라와 그 장소의 위치를 확인하는지도 궁금했다. 하지만 이제는 그 어떤 것도 물어볼 수 없다. 그저 예전의 추억을 곱씹으며 쓴웃음을 지을 뿐이다. 나는 공허해진 기분을 느끼며 발길을 돌려 버스정류장을 향해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걷다가 골목 안의 한 건물 앞에 다다랐을 때 선우와의 추억 하나가 떠올랐다.
우리가 동네 탐험을 통해 발견해서 자주 갔던 카페가 어느 날 갑자기 문을 닫았었다. 유리창에는 ‘개인 사정으로 영업을 중단합니다’라는 메모만이 붙어있었다. 선우는 정말로 안타까워하며 말했었다.
“아니, 어떻게 이렇게 갑자기 없어질 수가 있어? 우리가 여기서 함께 했던 추억이 얼마나 많았는데. 말도 안 돼. 이건 정말 마치 우리의 그 많은 추억들을 한순간에 빼앗긴 듯한 느낌이라고.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
이제는 4층짜리 번듯한 주택이 들어서 있는 그 카페 자리 앞에서 나는 그 추억을 떠올리며 조용히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아마 그 카페가 영원했어도 우리의 추억은 언젠가는 사라졌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