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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얼 Feb 25. 2024

04_준비의 시간



며칠 전 이른 봄이 찾아온 듯 2월답지 않게 따듯한 날이었다. 버스로 세 정거장, 2㎞ 조금 넘는 거리를 가야 할 일이 생겼는데, 살짝 고민하다 날씨도 너무 좋고 시간에 쫓기는 일정도 아니어서 천천히 걸어가기로 했다. 편안한 옷차림에 운동화를 신고 집을 나섰다. 따사로운 햇볕을 받으며 걷고 있으니 괜스레 기분이 좋아졌다. 듣고 있는 노래에 맞춰 발걸음에 저절로 리듬이 실렸고 난 평소보다 조금 더 빠르게 걸었다. 그렇게 10분 정도 걸었을까. 왼쪽 무릎에 찌릿찌릿 통증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이런, 또 너구나. 내가 깜빡 잊고 있었네. 난 무릎에 무리가 가지 않도록 속도를 살짝 늦춰야만 했고 조금은 어정쩡한 걸음으로 목적지를 향해 걸었다.

 

약 10년 전, 난 한창 달리는 재미에 빠져있었다. 거의 매일 달렸던 것 같다. 출근 전 회사 지하에 있는 체육관에서 러닝머신 위를 뛰기도 했고, 퇴근 후 저녁에는 집 근처 중랑천 산책로를 뛰기도 했다. 길어야 고작 3㎞ 남짓 20분 내외이긴 했지만 뛰고 나면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좋았다. 저녁에 중랑천의 바람을 맞으며 뛰는 건 특히 더 좋았다. 그렇게 달리기에 재미를 붙여가고 있을 때 한 스포츠 브랜드에서 누구나 참가 가능한 마라톤 대회를 연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강변을 10㎞ 달리는 코스였다. 재밌을 것 같아 난 친구와 함께 바로 신청했다.


호기롭게 신청은 했지만 10㎞는 결코 짧은 거리가 아니다. 오랫동안 꾸준하게 달린 것도 아니었고, 달리는 자세나 호흡 방법 같은 걸 제대로 배운 적도 없었다. 심지어 쉬지 않고 5㎞를 넘게 달려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렇기에 제대로 달리기 위해선 보다 제대로 된 연습이 필요했다. 그건 선택이 아닌 필수였다. 하지만 난 전혀 그렇게 하지 않았다. 무슨 자신감이었는지 모르겠지만, 평소에 달리는 것만으로 10㎞ 정도는 완주할 수 있다고 가볍게 생각하며 무작정 대회에 참가했다. 다행히 생각한 것처럼 완주는 했다. 하지만 아무런 준비 없이 달린 대가는 결코 가볍지 않았다.


중반까지는 그럭저럭 달렸지만 후반으로 접어들면서 처음부터 엉성하던 페이스가 급격하게 무너졌다. 엉망이 된 리듬과 호흡은 내 몸에 점점 부담을 주었고, 어느 순간부터 왼쪽 무릎에 조금씩 불편함이 느껴지기 시작했다. 그때부터라도 페이스를 조절하며 조심했으면 그나마 괜찮았을 텐데, 경솔했던 난 결승점까지 1㎞를 남겨두었을 때 스퍼트를 낸다며 있는 힘 없는 힘 모두 짜내 전력으로 달렸다. 결국 마지막 질주는 내 무릎에 치명타가 되었고, 결승점을 통과한 난 걸을 때마다 왼쪽 무릎에 극심한 통증을 느끼며 절룩이는 걸음으로 집에 와야만 했다.


다행히 통증은 별다른 치료 없이도 며칠 지나 사라졌다. 하지만 완전히 사라진 건 아니었다. 그때 내게 찾아왔던 통증이란 녀석은 평소엔 조용히 숨죽이고 있다가 내가 조금이라도 무리를 한다 싶으면 고슴도치처럼 바늘을 세워 무릎을 공격한다. 못 참을 정도로 심한 건 아니지만 분명 불편하다. 녀석 때문에 지금도 운동을 시작할 때 괜히 조심하고 주저하게 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렇다고 녀석을 원망할 수는 없다. 녀석을 오게 만든 건 바로 나, 나의 무지와 오만이었으니까.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선 그에 맞는 준비가 필요하다. 적절한 기술을 습득해야 하거나 충분한 시간과 비용이 투입돼야 할 수도 있고 단호한 결심이 필요할지도 모른다. 아니다. 아마도 이 모든 게 다 필요할 것이다. 이러한 준비 없이 무작정 부딪힌다면 분명 크고 작은 상처를 입게 되고, 그 상처는 어쩌면 더 나아가는 걸 망설이게 하거나 심지어는 큰 용기를 낸 결정을 포기하게 만들 수도 있다.


속도보다는 방향이라는 말이 있다. 제대로 된 방향을 잡기 위해선 치열한 고민과 준비의 과정이 있어야만 한다. 지금 나에게 주어진 시기는 무작정 달려 나가기보단 방향을 잡아야 하는 시기라고 생각한다. 그렇기에 남들보다 뒤처지는 것에 불안해하거나 조바심을 내지 말고 나라는 사람을 더 깊이 바라보려 한다. 부족한 부분이 무엇인지 약한 부분이 무엇인지 확인해서 그 부분들을 채우고 단단하게 만들어 가려 한다. 언제가 될지는 알 수 없지만 그러한 준비의 시간이 끝났을 때 난 나에게 맞는 속도와 호흡으로 내가 정한 방향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럴 수 있기를 간절히 희망한다.


_2024.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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