취미가 무엇이냐는 질문을 받았을 때 이십 대 중반까지는 딱히 내세울 만한 것이 없었다. 책을 읽거나 영화를 보는 걸 좋아하긴 했지만 그걸 취미라고 하기엔 스스로 뭔가 부족하고 아쉽다고 느꼈다. 사전에서는 ‘전문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즐기기 위해 하는 일’이라고 취미를 정의하고 있는데, 당시 내가 즐기기 위해 했던 거라곤 친구들과 만나 술을 진탕 마시며 시답지 않은 얘기나 지겹도록 떠들어 대는 것 정도였다. 지금 생각하면 왜 그리 시간을 헛되이 보냈는지 아쉬움만 가득하다.
이십 대 후반이 되어 직장생활을 시작하면서부터야 제대로 된 취미 생활을 즐겼던 것 같다. 아무래도 경제적인 여유가 생긴 만큼 다양한 시도가 가능했다. 수영, 사회인 야구, 테니스 등 그동안 생각만 하고 있던 운동들을 해보았고, 미술 학원에서 스케치를 배우기도 했으며, 조금 비싼 카메라를 사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사진을 찍기도 했다. 그리고 그렇게 시작했던 여러 취미 활동 중 피아노 연주도 있었다. 이전부터 악기 하나 정도는 배워 보고 싶었는데, 드럼과 피아노를 심각하게 고민하다 결국 피아노를 선택했다.
2013년 5월 명륜동의 한 피아노 학원을 등록하며 시작하게 된 피아노 레슨은 지난달 말 마지막 레슨을 끝으로 아쉽지만 당분간 그만두게 되었다. 중간중간 개인 사정으로 한두 달 정도 레슨을 쉰 적이 있기는 하지만 총 등록 기간은 10년이 넘었다. 일주일에 1회 50분 레슨이었으니 대략 계산해도 횟수로 500회에 시간으로 400시간 이상이었으며, 연습한 시간까지 포함하면 족히 1천 시간 이상 피아노 앞에 앉아 건반을 두드렸다. 이렇게만 얘기하면 상당한 연주실력을 자랑해야 할 것 같지만 사람들 앞에서 저 10년간 피아노 배웠어요, 라고 얘기하기에는 부끄럽게도 처참한 연주실력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이란 것이 있다. 1993년 한 연구를 통해 발표되고 이후 말콤 글래드웰의 저서 『아웃라이어』를 통해 전 세계적으로 대중화된 이 법칙은 그 의미에 관한 여러 갑론을박이 있지만 거칠게 정리하자면 “무엇인가에 전문가가 되려면 1만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 정도로 쓸 수 있을 것이다. 1만 시간은 하루도 쉬지 않고 하루에 12시간씩 투자한다고 해도 2년이 넘게 걸리는 시간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1만 시간은 단순히 그 행위를 하는 모든 시간의 총합이 아니다. 고도로 집중하고 전문가로부터 피드백을 받으며 끝없이 갈고닦는 과정을 반복하는 ‘의도적인 연습’의 시간을 의미한다.
이런 기준에서 보자면 나의 피아노 실력이 엉망인 건 어쩌면 당연하다. 고작 400시간 정도로 뭐 얼마나 멋진 연주를 할 수 있겠는가!―라고 당당히 핑계를 대고 싶지만, 나의 실력은 400시간을 투자했을 때 예상되는 실력에도 한참 못 미치기에 그냥 조용히 있는 게 좋을 것 같다. 하지만 10년 동안 중간에 그만두지 않고 꾸준히 피아노 레슨을 이어간 건 자랑해도 괜찮지 않을까 싶다. 난 보통 쉽게 싫증을 내고 흥미를 잃곤 하는데 가끔 이렇게 나도 놀랄 정도로 꾸준히 하는 것들이 있다. 아마도 피아노 연주가 재밌던 게 가장 큰 이유이지만, 그동안 듣기만 하던 곡들을 내가 직접 연주할 수 있게 되었을 때의 성취감도 레슨을 꾸준히 받게 한 이유였을 것이다.
2022년에 발표한 소설 「월간 윤종신」 속 ‘그녀’는 이렇게 말한다.
“난 꾸준한 게 좋아. 비록 사소한 일일지라도 파도가 멈추지 않듯 꾸준하게 한다면 그건 정말 굉장히 멋진 일이라고 생각해.”
당시 소설을 쓸 때도, 그리고 지금도 난 여전히 그렇다고 믿고 있다. 자신이 하는 일에서 뛰어난 성과를 내는 건 분명 중요하지만, 내게 있어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건 비록 의도했던 결과가 나오지 않더라도 그 일이 가치 있다고 믿는다면 꾸준히 오랫동안 하는 것이다. 1만 시간의 법칙이 무언가를 이루기 위한 물리적인 시간의 중요성을 말하고 있다곤 하지만, 본질은 그 시간을 확보하고 견뎌내기 위한 꾸준함의 중요성을 내포하고 있는 건 아닐까. 꾸준히 지속되는 시간은 화려하진 않을지언정 분명 의미 있는 자취를 남긴다. 마치 오랫동안 계속되는 낙수가 바위에 구멍을 뚫는 것처럼.
성북구 동선동에 위치한 작은 서점 부비프의 글방을 통해 취미로 글쓰기를 시작한 해가 2020년이었다. 글방을 꾸준하게 참여하진 못했지만 글을 쓰는 행위 자체는 그때부터 지금까지 계속해오고 있다. 글을 쓰는 건, 소설을 쓰는 건 이제 나에게 무엇보다도 즐겁고 행복한 행위가 되었다. 그리고 난 이제 글쓰기를 업으로 삼게 되었다. 그러다 보니 단순히 즐거움을 얻는 것에서 그치지 말고 눈에 띄는 결과를 내야만 한다는 압박을 어쩔 수 없이 받게 된다. 그리고 불쑥불쑥 밀려오는 불안함에 내가 과연 잘 해낼 수 있을지 종종 의심이 들기도 한다.
하지만 주사위는 던져졌다. 그렇기에 스스로 마음을 다잡고 이렇게 생각하려 한다. 글쓰기를 처음 시작했을 때부터 어림잡아 하루 10분씩이라 치면 지금까지 내가 글을 쓴 시간은 약 250시간 정도밖에 되지 않는다고. 1만 시간의 법칙을 기준으로 한다면 난 아직 걸음마도 떼지 못한 수준이라고. 그러니 불안과 의심으로 위축되고 주저하기보다는 그저 더 묵묵히 그리고 꾸준히 글쓰기에 집중하자고. 내가 할 수 있는 건 그것뿐이라고. 파도가 멈추지 않듯 그렇게.
_2024.02.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