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부터 23일까지 5박 6일 일정으로 일본 여행을 다녀왔다. 길다면 길 수도 있는 일정이었는데 하코네(도쿄 서측에 위치한 온천 휴양지)에서 2박, 그리고 도쿄로 이동해 3박을 했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20대 후반이 되어서야 해외여행을 다니기 시작한 나에게 3월의 해외여행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보통 해외여행은 여름휴가 기간에나 가능했고, 평소에는 길어야 주말 포함 3, 4일 정도의 국내 여행이 고작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특별한 휴일도 없는 3월 셋째 주에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해외여행을 다녀왔으니, 이것도 분명 퇴사한 프리랜서(라고는 쓰지만 실상은 백수인) 작가가 누릴 수 있는 크나큰 혜택이라고 할 수 있겠다.
이번 여행은 퇴사 후 새로운 삶에 도전한 나를 응원하고자 하는 의미의 여행이기도 하면서, 한편으로는 반복되는 일상에서 잠시 벗어나 낯선 환경과 사람들 사이에 머물며 무언가 새롭고 번뜩이는 영감을 얻고자 했던 목적도 있었다. 소기의 목적을 달성했다면 달성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 하코네에 머물면서 다행히 소소한 이야기를 구상할 수 있었다. 머무른 시간은 도쿄가 더 길었는데 도쿄는 너무나 화려하고 볼거리가 많아 안타깝게도 이야기를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결국 노느라 정신없었다는 말이다.)
하코네에서 떠오른 아래 이야기는 아무도 없는 노천탕에 혼자 몸을 담그고 가만히 시간을 보내던 중 떠올랐다.
소설가인 그는 일이 있어 일본에 왔다가 어쩌다 보니 하코네에 머물게 되었다. 그는 최근 단편 소설 몇 편을 발표했지만 주변의 평가가 그리 좋지 않았다. 기존에 그가 쓰던 스타일과 너무 달랐고, 그의 팬들은 달라진 스타일에 불만을 드러냈다. 그러자 그는 자신에게 의심이 들었다. 내가 쓰는 소설이 과연 의미가 있을까? 하코네에서의 마지막 날, 그는 숙소 온천의 아무도 없는 노천탕에 몸을 담그고 한숨을 쉬며 앞으로 어떠한 소설을 써야 할지 고민했다.
그렇게 시간이 한참 지나 머리가 멍해지려 할 때쯤 목욕탕 문이 조용히 열리며 누군가 들어왔다. 그리고 잠시 뒤 노천탕 안으로 들어온 그 사람은 그의 옆에 나란히 앉았다. 단둘만 있는 살짝 어색한 분위기에서 옆 사람을 힐끔거리던 그는 자신의 옆에 앉아있는 사람이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와 굉장히 많이 닮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하루키의 열성 팬인 그는 옆 사람이 사진 속 하루키의 외모와 너무나 흡사해 하루키일 수밖에 없다는 생각을 떨칠 수 없었고, 결국 실례를 무릅쓰고 긴장된 목소리로 물어보았다. 일본어는 할 줄 모르니 영어로.
“Ex……, excuse me. Are you Murakami Haruki?”
단정하게 접은 흰 수건을 머리에 얹은 채 눈을 감고 있던 그 사람이 살며시 눈을 뜨고 고개를 천천히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Yes.”
그는 놀라움과 기쁨에 숨이 멎을 것 같았다. 그토록 좋아하는 작가인 하루키를 실제로, 그것도 어쩌다 오게 된 하코네의 노천탕에서 이렇게 단둘이 만나게 되다니!
“Oh my god! I’m, I’m your big fan. I love all your novel. Ah, no, no. I love, I love all your writing.”
그는 버벅거리는 서툰 영어로 하루키를 향해 자신의 팬심을 어떻게든 전달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루키는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지그시 바라보다 짧게 한마디 했다.
“Thank you.”
그리고 다시 고개를 돌려 눈을 감고 조용히 사색에 잠겼다. 노천탕에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만이 흐르고 그는 그제야 자신이 하루키에게 무례를 범한 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팬이라지만 목욕탕에서, 그것도 발가벗은 상태에서 인사를 받는다면 그다지 유쾌하지는 않을 것 같았다. 무안해진 그는 조심스럽게 일어나 노천탕을 빠져나가려 했다. 그때 그의 등 뒤에서 하루키의 목소리가 들렸다.
“I know you are a writer.”
그는 깜짝 놀라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하루키를 돌아보았다.
“Don't doubt what novel you are writing. Don't worry about what people say.Just keep writing what you want to write.”
하루키가 말했다. 아니다. 하루키는 여전히 머리에 흰 수건을 얹은 채 눈을 감고 그저 물속에 가만히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는 하루키가 말했다고 확신하지 못했다. 그저 착각 속에서 들은 환청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설사 환청일지라도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작가가 자신에게 의심하지 말라고, 사람들의 말 신경 쓰지 말고 쓰고 싶은 걸 쓰라고 말해주었다는 것에 그는 기분이 매우 좋았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하루키의 응원 아닌가! 그는 하루키를 향해 허리를 숙여 공손히 절을 했다. 하루키가 그 모습을 보았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체크 아웃을 하던 중 직원에게 이 호텔에 하루키가 묵고 있냐고 물었다. 의아한 표정을 짓는 직원이 규정상 투숙객 정보는 알려줄 수 없다고 답했다. 단, 자신도 하루키의 팬인데 자신이 알기로 하루키는 지금 미국에 있다고 말하면서. 그는 미간을 찡그렸다. 그리고 어젯밤 분명 노천탕에서 하루키를 만났고 대화도 나누었다고 말했다. 직원은 잠시 난처한 표정을 짓더니 스마트폰으로 무언가를 검색하여 그에게 보여주었다. 지금 미국에 머무르고 있는 하루키가 한 대학에서 진행한 강연에 관한 어제 날짜 기사가 스마트폰 화면에 떠 있었다. 그는 기사를 읽고 또 읽으면서도 이 상황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분명 하루키는 어젯밤 자신과 나란히 노천탕에 앉아있었다. 자신이 꿈꾼 게 아니라면, 귀신이라도 봤다는 말인가? 아무 말도 못 하고 멍하니 서 있는 그에게 호텔 직원이 살짝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This situation really sounds like a Haruki novel.”
왜 이런 이야기가 떠올랐는지는 알 수 없다. 아마도 장소가 일본이었고, 하루키 소설에 살짝 비슷한 이야기가 있기도 하며(「시나가와 원숭이의 고백」), 어쩌면 내가 이야기 속 그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유야 어쨌든 따끈따끈한 노천탕 속에 가만히 앉아 이러한 이야기를 구상하는 경험이 그리 나쁘지 않았고 퍽 재미있기도 했다. 물론 이 이야기가 앞으로 내가 쓰는 소설에 어떻게 쓰일지는 아직 알 수 없다. 어쩌면 평생 안 쓰일지도 모를 일이다. 그래도 분명 하코네 여행의 추억으로 이 이야기는 남을 것이다. 그것만으로도 충분하다.
_2024.03.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