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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얼 Mar 28. 2024

09_소설을 쓰는 시간



매주 일요일 아침마다 교회에 간다. 기독교를 믿는 건 아니고, 결혼할 때 아내와 한 약속 중 하나가 바로 매주 함께 교회를 다니자는 것이었다. 어렸을 적부터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던 그녀에게 배우자와 함께 종교 생활을 하는 건 선택이 아닌 필수 사항이자 결혼의 중요한 조건이었다. 처음엔 믿음도 없이 교회에 다녀야 한다는 게 그리 내키지 않았고 어색한 느낌도 분명 있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거의 7년째 다니다 보니 이제는 교회라는 장소도, 그 속에서 만나는 사람도 그럭저럭 익숙해졌다.


예배 순서 중에는 성가대의 찬송이 있다. 거의 딴생각에 빠져있는 예배 시간 중에서 내가 유일하게 집중하는 시간인데, 그건 바로 지휘자의 지휘를 보기 위해서이다. 음악의 템포와 셈여림 등을 과하지 않으면서도 시원시원하고 직관적으로 보여주는 팔의 스윙, 성가대원들을 향한 무한한 신뢰와 응원이 느껴지는 밝은 표정, 그리고 오롯이 집중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순수하고도 폭발적인 에너지. 2, 3분 내외의 짧은 시간 동안 이어지는 지휘자의 지휘를 보고 있으면 곡과 성가대를 향한 확신에 찬 진심을 느낄 수 있다. 그에 맞춰 성가대원들도 자연스럽게 최선의 실력을 끌어내고 펼쳐낸다. 그렇게 지휘를 보고 있다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을 한다. 나를 저렇게 이끌어주는 사람이 나에게도 있었으면. 때론 이런 생각이 들기도 한다. 나도 누군가에게 저러한 사람일 수 있었으면.


규모가 작은 성가대에서도 지휘자의 역할은 중요하다. 더군다나 대규모 오케스트라에서 그 중요성은 말할 것도 없다. 지휘자는 작곡가의 의도와 악보를 해석하여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결정해야 하며, 이를 바탕으로 수십 개의 악기가 내는 소리를 조율하고 이끌어 나가야 한다. 간혹 지휘자의 역할을 인간 메트로놈 정도로 격하하는 의견이 있기도 하다. 연주는 결국 연주자가 하는 것이고, 그러므로 연주의 수준은 지휘자의 실력이 아닌 연주자의 실력에 의해 결정된다는 주장이다. 영화 <타르(TAR, 2022)>의 주인공인 세계적인 지휘자 리디아 타르는 이러한 의견이 틀린 소리는 아니라고 한다. 하지만 바로 그 메트로놈의 역할이 무엇보다 중요하다고 말한다. 자신의 지휘가 시작되어야지만 비로소 무대 위의 시간이 흐르기 시작하고, 자신의 지휘로 인해 그 시간이 정확히 통제되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리디아 타르의 대사는 결국 지휘자가 공연의 시작과 끝을 결정하며, 그 사이를 흐르는 시간을 주도해서 이끌어 가는 존재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소설가도 지휘자와 비슷한 것 아닌가 생각이 든다. 소설가가 첫 문장을 적으면서 이야기는 시작되고, 소설가의 의도에 의해 창조된 배경과 인물과 사건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며, 소설가가 마지막 마침표를 찍으면서 마침내 이야기는 끝이 난다. 다른 누구의 개입이나 도움 없이 오롯이 소설가 혼자서 이야기를 시작하고 이끌어가는 것이다. 앞서 내가 누군가에게 지휘자와 같은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했는데, 적어도 소설을 쓸 때만큼은 나도 내 소설에 그런 사람이라고 할 수도 있겠다.


물론 그렇다고 내가 소설을 쓸 때 확신을 품고 막힘 없이 열정적으로 마지막까지 이끌어 간다는 건 절대 아니다. 오히려 정반대에 가깝다. 난 소설을 쓰는 동안 계속 의심하고 망설이며 어떤 때는 스스로 비하하고 좌절하고 만다. 그리고 이러한 과정을 무한 반복한다. 그러한 과정을 거친 끝에 다행히 마침표를 찍게 되는 이야기가 소설로서 생명을 얻게 되고, 그렇지 못한 이야기는 윈도우 폴더 안에서 언제 깰지 알 수 없는 깊은 잠에 빠지게 된다.(종종 휴지통으로 사라지기도 한다.)


소설을 쓴다는 건 외롭고 고독하며, 어쩌면 고통스러운 시간을 통과해야만 하는 작업이다. 훌륭한 지휘자처럼 그 시간을 정확하게 주도하고 통제할 수 있으면 바랄 게 없겠지만, 아마도 난 지금보다 경험이 쌓이고 필력이 향상된다 해도 그렇게 되기는 어려울 것 같다. 분명 지금처럼 계속해서 그 시간의 속도와 부담감에 휘둘리거나 짓눌려 괴로워할 것이다. 그래도 그러한 시간을 거쳐 이야기의 마지막 마침표를 찍을 수만 있다면, 난 더 바랄 게 없다. 내가 시작한 이야기를 어떻게든 내가 끝냈다는 희열과 성취감은 그 어떤 것보다 크고 찬란하다는 걸 알아버렸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여전히 소설을 쓰는 시간과 고군분투하고 있다. 아니, 사랑하고 있다.



_2024.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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