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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얼 Mar 15. 2024

07_20세기 소년



명륜동의 후미진 골목 안 낡은 건물 2층에 <도어스2>라는 LP바가 있었다. (지금은 대로변으로 이사했다) 테이블, 의자, 선반, 장식장 등 모든 물건이 오래된 공간에서 LP로 옛 노래를 틀어주는 곳인데, 조도가 낮은 노란 전구 아래에서 맥주를 홀짝이며 커다란 스피커를 통해 흘러나오는 적어도 3,40년 전 노래를 듣고 있으면 지금이 과연 2000년대인가 의심하게 되는 곳이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가는 순간 마치 타임슬립을 하듯 과거로 이동한 건 아닐까 생각이 들 정도다. 서른 초반에 알게 되자마자 푹 빠져 단골손님이 된 지 이제 10년이 되어 가는데, 혼자도 자주 갔지만 가까운 사람들을 데리고 가 소개해주기도 했다. 내가 사랑하는 공간의 매력을 그들도 느낄 수 있기를 바랐던 것이다. 함께 좋아해 준 사람도 있었고 시큰둥한 사람들도 있었는데, 반응이 별로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특유의 너무 올드한 분위기에 딱히 흥미를 갖지 못했다. 아마도 오래된 노래가 취향이 아니었을 것이다. 사람마다 선호와 취향은 제각각이니 이상할 것도 없다.


난 오래된 노래들을 좋아한다. 90년대에 십 대 시절을 보냈으니 그때 노래를 좋아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즐겨 듣는 가요와 락, 팝송은 시대가 60년대부터 시작된다. 장르를 클래식까지 확장하면 좋아하는 음악의 시대는 18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도 있다. 요즘 일이십 대들은 대부분 들어본 적조차 없는 가수나 노래들일 것이고, 또래들에 비해서도 내 취향이 다분히 클래식한 게 사실이다. 왜 그럴까 생각해 보니 우선 어린 시절부터 라디오를 챙겨 들었는데, 그러면서 오래된 노래들을 자주 접하고 친숙해진 것 같다. 그리고 무엇보다 하루키 소설의 영향도 빼놓을 수 없다. 그의 소설에선 수많은 음악이 등장하는데 모두 오래된 락이나 팝송, 재즈 음악이고, 클래식 음악도 자주 나온다. 십 대 시절부터 하루키 소설의 열렬한 팬이 되어 부지런히 챙겨 읽었고, 그러면서 자연스럽게 그가 소설에서 언급한 음악들도 좋아하게 되었다.


그러고 보면 어릴적엔 소설도 하루키를 제외하면 동시대 소설은 거의 읽지 않고 발표된 지 적어도 반세기는 지난 소설만 읽었다. 그것도 셰익스피어, 카프카, 도스토옙스키, 토마스만, 콘래드, 조지오웰, 샐린저, 체호프 등 해외 유명 작가의 작품들만으로 편식했다. 지금이야 한국 작가의 소설을 비롯해 다양한 소설을 읽으려 하지만, 그때는 왜 그랬는지 그래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누구나 인정하는 세계 고전 소설만 읽어야 한다고. 그런 소설만이 가치 있고, 읽고 나서도 뭔가 남는 게 있다고. 물론 다들 훌륭한 소설이었고 많은 도움이 된 건 사실이지만, 동시대 소설 특히 한국 소설이 현대적인 문체로 그려내는 시대정신이나 인간상, 사회적 이슈 등을 제대로 접하지 못한 것도 사실이다.


이러한 나의 조금은 편향된 취향은 자의 반 타의 반 내 소설에 그대로 반영되었다. 특히 초창기 소설들이 더욱 그러한데, 소설 속 인물은 그다지 진취적이라고 할 수 없다. 부딪히고 극복하며 치열하게 시대를 통과해 나가기보단, 체념하고 과거를 그리워하며 내면의 문제에 침잠한다. 그들이 듣는 노래는 대부분 올드팝과 클래식이며, 그들이 활동하는 장소 역시 종로나 을지로 같은 서울의 오래된 구시가지들이다. 심지어 앞서 말했던 명륜동의 LP바는 소설의 주요 배경으로 사용되기도 했다. 내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21세기이지만 공간적 배경이나 인물의 생각 또는 행동은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한 마디로 옛날 감성의 소설들이었다.


실제로 독자평이나 합평 모임에서 내 소설이 조금 예스럽다는 의견을 종종 접하곤 한다. 좋게 보면 레트로 감성이라는 말이지만, 사실 현대성의 부족, 쉽게 말하면 구식이라는 말이다. 나도 충분히 인지하고 공감하고 있는 부분이며, 개선이 필요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좋은 쪽으로만 받아들여서 지금까지 해온 것처럼 내 스타일대로, 내 취향대로 소설을 쓸 수도 있다. 하지만 그렇게 쓴 소설은 나를 위한 소설, 일부 독자만을 위한 소설이 될 수밖에 없다. 난 내 소설이 보다 보편성을 획득하고 많은 사람에게 문학적으로 큰 울림을 줄 수 있기를 원한다. 그러기 위해선 분명 바뀌어야 한다.


소설에는 많은 유형이 있다. 요즘은 웹 소설의 인기로 순수한 재미를 추구하는 장르 문학이 각광을 받고 있다. 하지만 난 그러한 소설에 관심도 없고 쓸 능력도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그렇다고 내게 넌 어떤 소설을 쓸 건데, 라고 물으면 어떠어떠한 소설을 쓰겠다고 명확하게 말하기도 어렵다. 그저 막연하게 생각할 뿐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지금의 시대를 냉철하게 바라보고 문제를 드러내어 독자들과 함께 고민할 수 있는 소설. 어떤 형식, 어떤 장르가 될지는 모르겠지만 그러한 소설을 쓰고 싶다고. 써놓고 보니 너무 거창한 것 같아 민망하기도 하지만 도전 의식도 생긴다. 지금 당장은 힘들겠지만, 계속 쓰다 보면 언젠간 쓸 수 있지 않을까?


영국의 락밴드 T-Rex는 <20th century boy>라는 노래를 불렀다. 일본 만화가 우라사와 나오키는 <20세기 소년>이라는 작품을 발표했으며, 내가 좋아하는 가수 윤종신의 <1월부터 6월까지>가 수록된 015B의 앨범명도 <20세기 소년>이다. 나도 좋아하는 것, 즐기는 것이 아직 20세기에 머물러 있는 20세기 소년이다. 그것대로 매력적인 취향이고 그러한 취향을 가진 것에 나름 자부심도 느낀다. 하지만 그 소년이 쓰는 소설만큼은 20세기에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21세기를 누구보다 치열하게 살아야 하고, 어쩌면 22세기를 누구보다 먼저 바라봐야 할지도 모른다. 그 길이 쉽지 않고 오랜 시간이 걸린다고 해도 20세기 소년은 천천히 한 발자국씩 21세기를 내디뎌야 한다.


_2024.0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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