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지랄하고 있어.
내가 직장을 그만두고 전업 작가의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을 때 엄마가 처음으로 내뱉은 말이다. 문장으로만 얼핏 보면 화가 났거나 혼을 내는 것처럼 느껴질 수도 있다. 하지만 당시 엄마는 화를 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나를 혼낸 것도 아니었다. 내 생각엔 아마도 갑작스러운 아들의 선언에 그저 놀라고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도 모르게 순간적으로 과격한 어휘가 튀어나왔을 거라고 생각한다. 조금은 날카로운 엄마의 반응이었지만 난 그다지 당황하거나 놀라진 않았다. 사실 아내와 함께 과연 엄마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이런저런 추측을 하면서 난 비슷한 반응을 예상했고, 실제로 예상과 다르지 않자 나와 아내는 그 순간 좋아라 하며 웃을 수밖에 없었다. 엄마는 우리의 반응에 더 어처구니가 없었을 것이다. 얘네가 지금 제정신인가.
이후 엄마의 걱정과 의심, 그리고 만류가 이어졌다. 충분히 예상했던 흐름이었고 난 그에 맞서 자신과 확신, 그리고 고집으로 응수했다. 엄마가 뭐라고 하던 난 나의 결심을 무를 생각 따윈 전혀 없었다. 그래서 엄마를 만나기 전부터 이미 단단히 마음먹고 대비한 상태였다. 양측이 팽팽한 평행선을 달리며 논쟁이 길어지겠구나 생각한 순간, 뜻밖에도 엄마는(그리고 옆에서 조용히 별말 없으시던 아부지도) 이렇게 말했다.
그럼 너 하고 싶은 대로 해 봐.
엄마의 말투는 “그래 네 멋대로 한 번 살아봐.”, 또는 “네가 얼마나 버티나 보자.”라는 비꼬거나 무시하는 말투는 아니었다. 그것보단 약간 체념의 느낌이었달까. 아마도 다 큰 아들이 제 하고 싶은 거 하겠다는데 어쩌겠냐는 심정이 아니었을까 싶다. 어쨌든 예상보다 쉽게 수긍한 부모님의 모습에 난 조금 의아하기도 했지만, 생각보다 수월하게 넘어갔다는 것에 왠지 모를 뿌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엄마는―어쩔 수 없이―아들이 원하는 삶을 살아가는 모습을 마음 편하게만 지켜볼 수는 없었다. 날 만날 때마다, 그리고 통화를 할 때마다 내가 어떻게 지내는지, 무엇을 하는지 물어보며 걱정부터 앞선다. 내가 집에서 작업한다고 하면 매일 집에만 있으면 답답하지 않냐고 걱정하시고, 카페나 도서관에서 작업한다고 하면 그런 곳에서 작업이 잘 되냐고 걱정하신다. 요즘엔 3개월 동안 작업실을 지원받아 그곳을 사용한다고 하니 고작 3개월로 뭘 하냐며 걱정하신다. 북페어에 참여했다고 하면 몸이 힘들지 않냐고 걱정하시고, 신작이 나왔다고 하니 잘 팔리냐고 걱정하신다. 엄마는 내가 마음대로 쓸 수 있는 개인 작업실을 구하고, 신작이 날개 돋친 듯 팔려도 분명 걱정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밥은 잘 챙겨 먹고 다니니?
생각해 보면 엄마의 그런 걱정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결혼해서 가정까지 꾸린 마흔 살 넘은 아들이 10년 가까이 잘 다니던 직장을 갑자기 때려치우고 버는 돈도 불안정한 길을 들어섰으니 당연히 마음이 편할 리 없다. 박사과정까지 고생하며 공부한 전공과는 전혀 무관한, 과연 재능이 있는 건가 알 수 없는 소설 쓰기에 도전한 아들이 걱정이 안 되려야 안 될 수가 없다. 만약 내가 엄마의 입장이 된다면 더 하면 더 했지 못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엄마가 겉으로 드러내는 건 아마도 속에 품고 있는 불안과 걱정의 10분의 1, 아니 100분의 1도 안 될 것이다. 대부분은 내색도 하지 못하고 속으로 전전긍긍하며 까맣게 속을 태우고 있을 게 분명하다.
내 연배면 어느 정도 자기 위치를 확고히 잡고 안정을 추구하기 시작하는 게 보통일 수 있다. 불확실한 변화와 도전은 웬만하면 피하고, 설령 자신의 삶에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이 있더라도 그저 체념하는 게 나와 주변 사람이 편해지는 방법일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난 분명 남들과는 다른 길을 가고 있고, 그 행보가 가족들에게 걱정과 불편을 주고 있다는 건 애써 부정하려 해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런 면에서 분명 죄송하고 미안한 마음이다.
그렇기에 난 흔들리는 마음을 다잡고 내 선택을 끝까지 믿으며 최선을 다해 원했던 목표를 이루어야 한다. 그건 나 자신을 위해서이기도 하지만 근심과 걱정에도 진심으로 나를 믿어주고 기도해 주는 가족들, 엄마를 위한 것이기도 하다. 아들을 바라보는 노모의 표정에 계속해서 숨겨지지 않는 염려의 빛이 떠오르는 건 원치 않는다. 나를 향한 걱정이 아닌 기뻐하고 대견스러워하는 표정만이 얼굴에 가득하길 바란다. 그때가 부디 너무 멀지 않기를 희망한다.
_2024.07.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