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교 1학년, 아니 2학년 때였나. 국어 시간에 선생님께서 학생들에게 ‘길’을 주제로 짧은 글짓기를 시켰다. 기억이 완벽하진 않지만 난 대충 다음과 같은 느낌의 글을 썼다. 사람은 살아가는 동안 길을 걷는데 그 길은 때론 평탄하지만 때론 가파르기도 하며, 넓을 때도 있지만 매우 협소할 때도 있고, 곧게 뻗어있다가도 어느 순간 구불구불해지기도 한다고. 갈림길에선 선택해야만 하며, 그렇게 향하는 곳은 원하던 곳일 수도 있고 전혀 예상치 못했던 곳일 수도 있다고. 그리고 걸어가다 보면 언젠가는 길이 끝나는 순간을 마주할 수밖에 없다고. 길을 사람의 인생에 빗대어 쓴 글이었는데, 선생님께서는 내 글을 인상 깊게 보셨는지 내게 반 아이들 앞에서 소리 내어 읽어보라고 하셨다. 난 부끄러움과 자랑스러움이 혼재된 묘한 기분을 느끼며 주뼛주뼛 읽었던 기억이 있다.
거의 30년이 다 되어가는 오래된 이야기를 꺼낸 건, 전업 작가 생활 만 1년을 며칠 앞둔 지금 갑자기 이런 질문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난 어떻게 하다 전업 작가라는 길에 들어서게 됐을까? 생각해 보면 전혀 예상 못 했던 길이었다. 불과 5년 전까지만 해도 내가 그동안 걸었던, 그리고 앞으로 걸어야 할 길에 소설가라는 길은 없었다. 본격적으로 나의 길을 선택해야 할 시기가 되자 난 어릴 적 그렸던 수많은 꿈 중 그나마 현실적이라 생각한 건축가의 길을 가려했고, 이후 경로를 바꿔 도시계획의 길에 들어섰다. 건축과 완전히 동떨어진 것도 아니었고 건축보다는 내 적성과 더 어울린다고 생각해 선택한 길이었다. 그렇게 선택한 도시계획의 길은 흥미롭기도 했지만 내가 생각한 것보다 거칠고 가팔라 종종 거친 숨을 헐떡이며 힘들어했다. 가끔 이 길에 들어선 게 후회되기도 해서 조금 더 편하고 안정적인 길을 찾아 기웃거리기도 했다. 그래도 10년 이상 묵묵히 걷다 보니 내가 걷는 길에 그런대로 익숙해졌고, 길도 조금씩 완만해지고 넓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마 계속해서 걸었다면 내 앞에는 더 넓고 편안한 길이 펼쳐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몇 년 전 동네 서점의 글쓰기 모임을 시작한 이후부터, 그리고 소설을 쓰고 독립출판을 한 이후부터 내 눈앞에 다른 길이 어른거리기 시작했다. 그 길은 내가 이전까지 걷던 길과는 사뭇 달랐다. 마치 잘 정비된 산책로를 걷던 중 우연히 알게 된, 깊은 숲 속으로 연결되는 비밀스러운 오솔길 같았다. 협소하고, 어두우며,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전혀 알 수 없는 길. 하지만 그래서 더 궁금하고 끌리는 길. 한참 동안 주변에서 서성이던 난 결국 이제 겨우 익숙해지기 시작한 길을 벗어나 과감하게 미지의 길로 들어섰다. 바로 1년 전 이맘때, 전업 작가의 길로 들어선 것이다.
모험보다는 안정을, 새로움보다는 익숙함을 선호하던 내게 이 선택은 분명 너무나 뜬금없고 파격적이었다. 나를 아는 사람 그 누구도, 심지어 나조차도 전혀 생각해 본 적 없던 길에 들어서다니. 아마 그동안 마주했던 여러 갈림길에서 그랬던 것처럼 이성적으로 판단했다면 절대 들어서지 않았을 길이었다. 하지만 1년 전 그때 나를 지금의 길로 이끈 건 차가운 머리가 아니었다. 바로 뜨거운 나의 심장이었다. 어느 때보다 격정적이고 생기 넘치게 뛰던 심장의 박동 소리. 그 소리는 진정 원하는 방향을 향해 가라고 내게 속삭이는 소리였고, 두려워할 것 없다고 나를 격려하는 소리였다. 주저하고 고민하던 난, 결국 그 소리를 따르기로 했다.
그렇게 이 길을 걷기 시작한 지 이제 1년, 52주의 시간이 지났다. 길지도, 그렇다고 짧지도 않은 시간 동안 난 아직 길의 초입에서 멀리 오지 못했다. 내 앞으로 보이는 길은 여전히 좁고 평탄하지 않으며, 이리저리 굽어 있다. 때때로 장애물에 가로막혀 있기도 하다. 그런 길을 여기저기 부딪히고 넘어지며 서투른 걸음으로 걸어왔다. 이런 나를 보며 누군가는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으니 어디에 도달할지 모를 이 길을 포기하고 뒤로 돌아가 원래 걷던 길로 다시 돌아가기를 바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지금의 나는 내가 걷고 있는 이 길에서 벗어날 마음이 전혀 없다. 지난 1년 동안 이 길을 선택한 나의 결정을 단 한 순간도 후회하지 않았다. 단 한순간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길을 걷는 동안 외롭고 불안했지만, 동시에 난 이 길을 더욱 사랑하게 되었다. 그리고 다행히도,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다는 걸 확신하게 되었다.
이 길을 언제까지 걸을지는 알 수 없다. 이 길이 어디로 이어질지, 어디로 나를 보낼지도 알 수 없다. 어느 순간 갈림길이 나올지도 모르고, 그때 난 또 예상하지 못한 선택을 할지도 모른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그저 내가 믿는 건 포기하지 않는 한 길은 사라지지 않고, 난 계속해서 길 위에 있다는 사실이다. 그러기에 난 내 앞에 놓인 길을 걷는다. 천천히, 그리고 조금씩. 그렇게 앞으로 나아간다.
_2025.01.30
_연재를 마치며...
1년간 매주 한 편씩 썼던 전업작가 에세이는 이번 52번째 글을 마지막으로 연재를 마칩니다.
어리숙하고 불완전한, 하지만 점점 단단한 믿음으로 향하는 저의 전업작가 분투기를 그동안 관심과 애정으로 읽어주셨던 모든 분에게 진심으로 감사의 마음을 전합니다. 여러분의 응원과 지지가 저에게 정말 큰 힘이 되었습니다.
52편의 글은 3월 말 단행본으로 출간될 예정입니다. 당분간 브런치에 글을 올리진 못하지만, 언젠가는 새로운 글로 다시 찾아올 것을 약속드립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