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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채물감 May 26. 2020

아직도 더 자라야 하는 나이

오후부터 전국에 비가 내린다 하니, 어제 운동화 빨기를 잘했구나 싶었다. 아직 햇볕도 좋고 바람도 좋고 미세먼지도 없으니 비오기 전에 공원 한 바퀴 휙 돌아야지. 운동화도 잘 말랐겠지 하며 베란다 바닥을 내려보았다. 그런데 이런, 운동화가 없다. 열심히 빡빡 문질러 빨고서 탈수를 하겠다고 세탁기에 집어넣고는 널어놓는 걸 깜빡하였다. 어제 곧바로 널었다면 지금쯤 다 말랐을 것을. 자꾸 다음 할 일을 잊어버리는 것은 오랜 지병이라 놀랄 것도 없다. 당장 세탁기로 달려가 큰 딸과 작은 딸의 운동화 한 켤레씩을 꺼내와 베란다 바닥 햇볕이 드는 곳에 가지런히 널었다.


아이들 옷을 사고 신발을 사고 생활용품들을 사면서 세월을 느끼곤 한다. 온종일  잘 먹고 잘 자고 잘 놀면 오케이였던 갓난아이가 걷고, 말하고, 유치원을 가고, 학교를 갔다. 인형 옷 같은 옷을 입던 아이가 점점 사이즈가 커지고, 이제는 엄마 옷을 입고 나가기도 한다. 내 발 크기만 한 아이들 운동화를 가만 보고 있자니 갑자기 십수 년을 훌쩍 뛰어넘은 느낌이다. 분명 아이들을 키우는 동안 어려움이 없지 않았는데도 그 시간들이 꿈을 꾼 것처럼 아득하다.


베이비시터에 대한 신뢰가 없었던 남편 뜻에 따라 아이를 시부모님께 맡기고 주말부부에 주말 가족으로 지내던 때가 있었고, 아침 일등 등원 저녁 꼴찌 하원을 도맡아 선생님을 유치원 엄마라 불렀던 시절이 있었다. 첫째 아이 초등학교 1학년 여름방학, 밥통 뚜껑이 열린 채 숟가락이 꽂혀 있고 반찬통들이 그 앞에 널브러져 있는 것을 보았던 날의 미안함, 혼자서 며칠 점심을 때운 아이가 저녁을 먹다가 ‘엄마, 오늘은 좀 쓸쓸한 생각이 들었어.’라고 했을 때 눈물이 핑 돌던 그 먹먹함... 학교 돌봄교실과 보습학원 종일반을 거부하며 ‘엄마, 나도 자유 필요해’ 하면서 씩씩하게 엄마를 안심시키더니 세상이 그리 만만치 않은 것을 아이는 그때부터 이미 실감하였을 것이다. 떠올리면 그 날의 감정들이 아직까지 고스란히 남아 있는데도 어느새 그 시간은 저만치 멀어져 있다.


시간이 약이라는 말은 정말 맞는 말이다. 당장 괴롭고 힘들어도 시간은 흐르고 어느 쪽으로든 결론이 나며 상처는 조금씩 아물어간다. 육아도 그렇다. 유치원 때부터 이미 ‘깜빡쟁이 엄마’였던 탓에 아이는 스스로 준비물을 챙기기 시작했고, 출근하는 엄마가 모든 학교 행사에 다 참여할 수 없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였으며, 커갈수록 엄마가 일을 하는 것이 자신에게도 훨씬 경제적 이득이라는 합의에까지 도달하였다. 이제는 학교에서 있었던 일을 재잘거리다가 내가 이야기에 집중하지 못하는 것을 눈치채고 '엄마 내 얘기 듣고 있어?' 서운한 물음에, '미안, 사실 지금 엄마가 회사 일로 머릿속이 시끄러워. 우리 딸 이야기가 하나도 안 들어와'라고 대답해도, 아이는 조용히 엄마를 내버려 둘 줄도 안다. 부족한 엄마는 그저 고맙다.


아이들은 서툰 엄마보다 더 잘 적응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언젠가 ‘엄마 회사 그만둘까?’ 하였을 때 아이는 ‘엄마 왜?’라며 전혀 생각하지 못한 질문이라는 듯이 놀란 눈을 깜빡거렸다. 항상 엄마가 집에 있었으면 좋겠다 했던 쪼꼬미 아이의 바람에 뒤늦은 메아리 실없는 농담으로 뱉은 말이었으나, 아이의 ‘왜’라는 한 마디에 나는 순간 얼음이 되었다. 이제는 엄마가 일을 그만두는 것을 아이들이 반대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이르니 슬쩍 서글퍼지기까지 하였다. 임용 2년 차 어린 후배가 아버지의 명예퇴직을 대놓고 반대하는 얘기를 들었을 때, 내 아이들이 저리 말을 한다면 적잖이 서운하겠다 싶었던 적이 있다.


젖먹이를 200킬로미터 거리에 멀리 떼어놓고 일요일 저녁마다 눈물로 이별하 내가 무슨 영화를 보겠다고 이러고 있나 싶으면서도 놓지 않은 직장이었다. 적성이고 뭐고 그런 것은 중요한 것이 아니다. 남들이 알아주는 전문직도 아니고 대단한 사명감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럼에도 직장을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결국 돈이다. 좀 더 있어 보이는 다른 가치들로 기준 삼아 보고 싶지만, 누구에게도 꿀리지 않을 자존감과 독립성아무리 봐도 자본에서 나오는 것 같으므로. 래서 나와 맞지 않는다고 쿨하게 사표를 날리고 싶다가도, 박차고 나가서 내가 무얼 해서 돈을 벌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마주하면 결국 배부른 소리라 주저앉고 만.

30년 근무한 선배들은 ‘애들이 어릴 때야 이것저것 다 힘들지, 애들 크면 달라진다’고 말한다. 엄마손이 필요 없어지면 시간이 남기 시작하고 그때쯤 되면 도 별로 어려운 것이 없어진다고, 그럼 그만두겠다는 생각 같은 건 들지 않을 것이라고 말이다. 맞는 말인 것도 같다. 문제는 아직 거기까지 가질 못했다는 점이다.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은 감사하면서도 평가와 승진은 늘 나를 초라하게 만든다. 우직함과 성실함은 그에 걸맞은 보상을 약속하지 않고, 처세의 기술은 어울리지 않으며, 원거리 근무지로의 이동은 늘 내 발목을 잡는다.


마흔다섯, 직장생활 20년 차, 어릴 때 바라보던 엄마의 나이, 이 정도 나이면 인생에서 뭔가 되게 안정적일 거라 막연하게 생각했던 나이, 그러면서도 또 어떤 건지 상상도 되지 않았던 나이이다. 불혹이라는 말은 그 옛날 공자님께나 해당되는 것이었다. 지천명을 향해 가면서도 나는 아직도 나를 모르겠고 마음대로 되지 않는 내 마음을 어떻게 추슬러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직도 덜 자란 모양이다.


멋진 어른이고 싶다.

버릴 건 멋지게 버리고 싶다. 그러나 쿨하게 버리지 못하고 바둥바둥 질척인다.

주어진 것을 기꺼이 누리고 싶다. 그러나 소소한 행복이 나를 풍요롭게 한다는 사실을 자주 잊어버린다. 

흔들리지  않고 싶다. 하지만 살랑바람에도 온 마음이 뒤척인다.


계속할 끈기도, 멈출 배짱도, 새로이 시작할 용기도 솟아나지 않는 이 부끄러운 상태를 해결해야 한다.

휴식은 꿈이었고 수행의 시간인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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