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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수채물감 May 13. 2020

안녕 테디

아직까지 다 정리하지 못한 겨울 니트 몇가지를 수납함에 집어넣다가 몇 년 전 제대로 시작도 못하고 팽개쳐두었던 테디베어 DIY세트를 발견했다. 호주에 이민 간 친구가 결혼을 결심했다는 소식을 듣고 인터넷으로 구입 거였다. 둘째아이를 임신하고 태교삼아 테디베어를 하던 때, 구가 결혼을 하게 되면 선물로 신랑신부 테디베어를 만들어주겠다 약속했었. 거의 10년이 지나 다시 바느질을 해보겠다고 재료를 구입해서는 몇 주를 미루다가 겨우 다리 한쪽을 만들었었다. 그러다 결혼을 다시 생각하기로 했다는 친구의 연락이 왔다. 바느질을 자꾸 미루고 싶었던 이유가 있었어 다가, 내가 이걸 미룬 탓인가 하는 쪽으로 방향이 틀어졌다. 친구의 선택이 테디베어 탓일 리 없음에도, 바느질을 미적거렸던 내가 괜시리 괘씸해졌다. 그렇게 웨딩커플 테디베어 DIY세트는 내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치워지고 기억에서 사라져버렸다.      


일을 쉬고 하루종일 집에 있다 보니 그동안 마음 한켠에 밀어두었던 것들을 하게 된다. 이번 타겟은 테디베어이다.      


테디베어는 Teddy에게서 시작되었다. Teddy는 미국 제26대 대통령 시어도어 루스벨트의 애칭이다. 사냥이 취미였던 루스벨트가 미시시피강으로 사냥여행을 갔다가 사냥감을 잡지 못하자 보좌관들이 새끼곰을 잡아 줄로 묶어 놓았는데, 루스벨트는 그 새끼곰을 쏘지 않고 살려주었다. 만화가 클리포드 베리만이 이 장면을 포착하여 그린 삽화가 워싱턴포스트지에 게재되었고, 뉴욕에서 장난감을 판매하던 모리스 미첨이 이 일화에서 모티브를 얻어 직접 곰인형을 만들어 ‘Teddy’s Bear’라고 이름지었다. 루스벨트에게 서신을 보내 테디라는 이름을 사용하도록 허락도 받았다고 한다. Teddy’s Bear가 인기를 얻으면서 곰인형을 대량생산하는 회사들이 생겨났고 이후 꾸준히 전 세계에서 사랑을 받고 있다.      


내 기억에 우리나라에서 테디베어가 유행하게 된 것은 2006이라는 MBC TV 드라마가 큰 역할을 했다. 우리나라가 광복 후 대한제국 황실을 복권하고 입헌군주제를 채택하여 현재 황실이 존재한다는 가정 하에 궁을 배경으로 전개되는 이야기로, 현대적 궁궐의 인테리어나 의상 등 볼거리가 가득했던 드라마이다. 테디베어가 드라마에 소품으로도 등장하기도 하고 매회 엔딩 장면에 테디베어를 이용해서 에피소드를 재현하여 엔딩을 보는 재미도 쏠쏠하였다. 드라마 덕에 테디베어를 활용한 마케팅이 유행했고 테디베어 박물관도 여러 곳 생겨나기도 했다.      


디자이너들의 테디베어 작품들을 보면 감탄이 절로 나온다. 우리집에는 작품이라고 부르기 부끄러운 테디베어들이 거실 여기저기에 놓여 있다. 15년 전 내가 바느질했던 테디들이다. 초보 수준의 베어들이라 볼품은 없어도 차마  버릴 수가 없다. 고급 작품은 의상도 복잡하고 얼굴 표현도 난이도가 높지만 원단 가격 또한 만만치 않다. 열심히 실력을 키워서 고급 작품들을 만들어 보리라 했으나 둘째를 낳은 후로 여유를 찾지 못하였다.


오랜만에 다시 바늘을 집어들었다. 너무 오랜만이라 무엇부터 해야 할지 모르겠다. 완제품의 사진이 없다. 포장비닐에 붙어있는 구매사이트를 검색해 보았으나 사이트조차 사라지고 없다. 완성품이 어떤 모양인지 모르겠으니 눈코입은 어찌해야 할지 옷은 어떤 모양인 건지 모르겠다.

원단 도안에 간략히 기재된 설명을 보며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원단들을 이어붙이고 뒤집어보니 대충 모양이 나오기 시작했다. 머리부터 솜을 집어넣어 보았다. 머리 솜을 단단히 채우고 목을 오므리니 동그랗고 오동통한 얼굴이 만들어졌다. 팔다리를 연결하고 솜을 채우고 창구멍을 막았다. 곰 한 마리가 탄생했다.

그런데 아이쿠, 눈코입을 먼저 완성했어야 . 이미 몸통이 완전히 연결된 얼굴에 눈알을 붙이고 코와 입 수를 놓아야 하게 생겼다. 괜찮다. 다행이 털이 있는 곰이니 마감질은 털로 잘 가려보기로 했다.

커플 중 한 마리를 완성하는데 꼬박 하루가 다 걸렸다. 나머지 한 마리는 한 번 해보았다고 그런지 아주 조금 시간이 덜 걸린 듯 하다. 신랑 베어의 삐딱한 팔 한 쪽보다 거슬리는 한 가지, 신랑은 푸우처럼 상의만 입고 있다. 나중에 어울릴만한 짜투리 옷감을 찾으면 바지를 만들어 입혀야겠다.

 

눈은 침침하고 허리어깨도 뻐근하지만, 어설픈 완성작 테디 커플은 나를 흐뭇하게 했다. 인증샷도 요리조리 찍어보았다. 사람들은 이런 기분으로 SNS를 하는가 보다. 예쁜 것을 오래 담아두고 싶고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 최고로 멋져보이는 각도로 사진을 찍어 올리고 좋아요를 기다리는 것이다. 나도 가끔 널리 자랑하고 싶은 것이 생긴다. 지금이 그 순간이다. SNS 대신 딸들을 불러낸다. 엄마의 완성작을 짜잔 하고 보여준다. 착한 딸들은 우와하며 밝은 리액션으로 엄마의 뿌듯함을 어루만져준다. 그래서 나는 오늘도 가슴이 따뜻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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