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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쮸댕 Sep 03. 2022

할머니를 생각한다

하얀 콩물과 기억

"이거 할머니가 주신 콩으로 만든 건데 아침에 먹으니까 좋아~"


휴대폰 속 엄마는 아침식사 중인지 입술에 하얀 콩물을 묻히면서 말씀하신다.


"할머니가 주신 콩이 아직도 있어?" 놀라서 물었다.


"그러네, 아직도 남아있네~ "


할머니가 돌아가신 지 5년이 넘었는데, 그의 손에서 길러진 자연은 여전히 우리 곁에 있다.


할머니는 조그마한 체구에 오밀조밀한 눈코 입을 가진 여성이었다. 얼마나 체구가 작았냐 하면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입었던 푸른색 패딩 조끼를 할머니가 물려 입으실 정도였다. 그를 생각하면 한시도 쉬지 않고 일하던 모습이 떠오른다. 시골 다방에서 유흥을 즐기시던 할아버지 때문에 논밭을 대부분 혼자 가꾸셨다. 김장철이 되면 자식들에게 보낼 수십 포기의 김치를 담가 일일이 택배로 부쳐주셨고, 우리 집의 고추장, 된장, 마늘 등은 모두 할머니가 보내주신 것들이었다.


성격이 억세거나 강인한 면모는 없었다. 조용하고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다. 말투도 조곤조곤하여 이웃의 이야기를 구체적인 부분까지 잘하셨고 또 잘 들어주시기도 했다. 또한 웃음도 많으셨다. 수줍은 웃음이었다. 작은 눈에 올라간 눈꼬리 주변의 주름들이 웃음기를 더 환하게 만드는 것 같았다. 며느리를 포함한 그 누구에게도 싫은 소리를 못하시는 분이셨다. 큰아버지가 가난 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한 것에 대하여 평생 죄책감을 안고 사셨다.


저녁 여덟 시에 하는 일일 드라마도 꼭 챙겨 보셨는데 그 어떤 관계들이 얽히고설켜있고 주된 갈등은 무엇인지 정확히 파악하고 계셨다. 그 누구보다 인물이 처한 고난에 애석해하는 시청자가 우리 할머니였다.


하지만 할머니는 본인의 삶이 드라마보다 더 굴곡졌다. 625가 터졌을 때 할아버지 형제 가족과 함께 일가족이 피난을 갔는데 당시 할머니는 만삭의 임신부였다. 스스로의 몸도 가누기 힘들었을 텐데 갓난아기인 시조카를 등에 없고 양손에는 또 다른 조카 둘을 이끌고 산을 올랐다고 한다. 그렇게 피난길에서 돌아와 아이를 낳았는데 이미 죽어있었다고 했다. 할머니 표현을 빌리자면 어찌나 고생을 했던지 갓 태어난 아기 머리카락이 한 움큼씩 숙숙 빠지더란다. 아마 살아 있었다면 장녀였고 지금 큰아버지보다도 누나였을 거다.


할머니는 이후에 또 한 명의 자식을 먼저 보냈다. 우리 아버지의 작은형이다. 삼십 대 중후반의 젊은 나이에 두 아들딸을 남겨두고 병으로 돌아가셨다. 이후 할머니는 손주들과 함께 살면서 평생을 돌보고 키우셨다.


나는 자식을 잃은 슬픔에 대하여 감히 상상하지 못한다. 그저 할머니의 인생에 대하여 '기구하다'정도로 표현하는 것밖에 할수가 없다.


그는 내 삶 속에 있는, 단연 최고의 희생의 아이콘이다.


일러스트 by 쮸댕



그가 만약 경제적으로 넉넉한 집안에서 학업을 지원받고 자신과 비슷한 정도의 부지런한 배우자를 만났다면 어떤 삶을 살았을까? 큰 욕망을 품는 성격은 아니어서 사회적으로 높은 지위에 올랐을 것 같지는 않다. 어쩌면 예술가의 길을 걷지 않으셨을까. 섬세한 시선으로 주변을 관찰하고 아름다운 언어로 드라마 같은 걸 만들었을 수도 있겠다.


오로지 자식들이 유일한 세계이자 우주였던 할머니. 그 안에서 헌신으로 점철된 인생을 살아오셨지만 상상 속에서는 마음껏 자유로울 수 있으니까.


내 멋대로 상상해보는 할머니의 또 다른 인생은 드라마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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