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렌지와 젖은 바르셀로나
미쉐린이랄지 신인 배우랄지 하는 것들은 서서히 의식의 변방으로 명멸했다.
젖은 바르셀로나의 안에서 나는 오웬 윌슨이 되고, 티모시 샬라메가 되었다.
잠의 세계에 미쉐린 가이드가 있다면 별 하나는 거뜬히 받았을 법한, 흥미로운 잠이었다.
요 몇 달, 줄곧 시리얼 따위 같은 공허한 잠을 끼니 삼아 연명하던 나에게, 아주 든든한 잠이었다. 대신 혀가 아닌 굳건하게 닫힌 눈꺼풀로 나는 그 풍미를 음미할 수 있었다. 시각적 풍미인 것이다. 그 풍미는 나의 영사기를 통해 눈꺼풀에 비쳤다가 망막 깊은 곳에서 음미되었다. 그 기묘한 영상은 정확히 반시계 방향으로 90도 돌려진 채, 상영되고 있었다. 곧이어 유일한 등장인물 1은 렌즈를 힐끔거렸다. 배우로서 가당치도 않은 실수이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그 '신인' 배우는 아예 '렌즈'를 응시하기에 이르렀다.
B급 감성의 나른한 풍미를 감상하던 어느 순간, 갑자기 엔딩크레딧이 미처 나오기도 전에 영사막이 걷어지며 암실이었던 영사실 내부가 환해졌다. 워낙 급작스럽게 밝아진 탓에, 풍미의 잔상만은 그대로 남아있었다. 하지만 그 흐릿한 잔상은 이상하리만큼 언제까지나 날아가지 않았다. 안경의 위치를 가늠하며 손을 뻗어 그 흐릿한 잔상에 초점을 맞췄다. 그 '잔상 같은 것'에 초점이 맞춰지기까지는 시간이 걸렸다.
그렇다. 잔상이 아니었다. 등장인물 1은 고모부였고, 그는 나갈 채비를 모두 마치고 내 앞을 서성이고 있었던 것이다.(방의 구분이 없었음). 미쉐린이랄지 신인 배우랄지 하는 것들은 서서히 의식의 변방으로 명멸했다.
커튼 하나 없었는데도 불구하고, 창문 틈새로 새어 들어오는 빛은 없었다. 영화관을 연상케 했다. 빛의 차단이 숙면에 이렇게나 중요하다니, 서울 돌아가면 암막 커튼 하나 장만해야겠는 걸 하는 잡생각을 하며 핸드폰 시계를 봤다. 오전 6시 언저리였다.
우리는 바로 어제, 늦은 밤, 여기 바르셀로나 숙소에 도착했다.
이런 불상사를 우려하며 오전 8시 반에 나가서 조식을 먹는 것으로 자기 전에 '약속'을 했더랬다. 그들의 부지런한 특성을 '나름대로' 고려하여 8시에 나간다고 여기며, 7시 알람 설정을 하고 잠들었다. 나의 판단 미스인 것이다. 그들은 이틀에 두 번만 쉬며 일했던 사람들이다.
물론 나는 아침형도 아닐뿐더러 새벽에 잘 순 있지만 새벽 기상은 영 곤란한 사람이다. 설상가상으로 퇴사 이후, 나의 시차는 점점 더 괴상해져 그들과는 아예 반대로 맞춰져 있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의도치 않게 나는, 한국에서부터 유럽의 시차에 맞게 지냈던 괴상한 사람이기에 새벽기상이 예상보다 고되지는 않았다. 여하 막론하고 준비부터 해야 한다. 물론 이미 나갈 채비를 모두 마친 두 사람의 눈치가 보였지만 별 수 없다.
숙소를 나오고 시계를 보니 예상 시간보다 한참 이른, 오전 7시 40분이었다. 밤의 나라인 스페인의 아침 거리는 한적했다. 사람도, 차도 거의 없었다. 시간이 조금 흐른 뒤에도 비슷한 풍경이었다. 여기는 출근 시간이 도대체 몇시일까부터 시작해서, 이 사람들은 일을 안 하나 하는 의문들이 꼬리를 물며 이어졌다. 실로 스페인의 노동환경이 궁금해지는 풍경이었다. 이후에도 개성적인(여러 의미로) 노동환경을 경험하게 되었다.
아침의 바르셀로나는 추적추적 비가 내리고 있었다. 고모부의 리드를 따라 브런치 가게로 향했다. 8시 반에 오픈한다던 가게는 10분 늦게 문을 열었다. 오렌지 주스, 라테, 블랙 아메리카노, 버거, 아보카도계란 샌드위치를 주문했다. 주문 즉시, 보란 듯이, 착즙 해서 내온 오렌지 주스의 그 새코롬한 풍미에 집중했다. 두 분은 음식을 먹으며 연신 감탄을 했다. 분명 음식의 맛이 좋긴 했지만 사실, 이 정도 맛은 한국의 성수나, 한남 등지의 브런치 카페에서도 충분히 먹을 수 있을 법한 맛이라고 생각했다. 맛있지만 스페인에서 감탄을 자아낼 정도의 풍미는 아니라는 의미이다. 그래서 나는 약간은 슬퍼지기도 했다. 그들이 한국에 돌아가서도 더 다양한 풍미를 경험할 수 있을 정도의 여유는 가지며 살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저 바람일 뿐이지만, 그 생각은 나를 숙연하게 했다.
스페인을 비롯한, 유럽 몇몇 나라에서 먹는 오렌지 주스는 우리나라의 그것과 비교 불가할 정도로 맛이 좋다. 격렬한 햇빛을 고스란히 받아 당도가 높고, 비비드 한 색감 또한 맛의 생동감에 한몫한다. 오렌지가 주렁주렁 달린 가로수를 길가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걸 보면, 상징으로써의 역할도 가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실제로 오렌지는 스페인의 주요 수출·상품 작물 중 하나이다. 뛰어난 일조량을 바탕으로 주로 스페인의 동, 남부 등지에서 재배된다. 발렌시아의 오렌지가 가장 유명한데, 즙이 많은 것이 특징이라 주스의 형태로 가공된다.
이튿날의 유일한 계획이었던, 명품거리의 오픈 시간까지 시간을 때우기 위해 바다로 향했다. 해조차도 아직 눈을 부비고 있을 만큼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지중해는 상상 속의 그것과 많이 달랐다. 서해바다를 연상케 하는 잿빛을 따라 일정한 간격으로 심어진 야자수 만이 '지중해스러움'을 뽐내고 있었다. 그러나 안개인지 바람인지 모를 것들과, 잿빛바다 그리고 추적추적 내리는 비를 커버하기엔 다소 역부족인 듯 보였다. 그 머쓱한 조화 속에서 우리는 바다를 등지고 길을 따라 걸었다.
머쓱한 야자수와 잿빛 지중해를 외면하고 젖은 거리 속에 들어가니, 한결 편안했다. 여전히 날씨는 을씨년스러웠고 젖은 거리의 저채도 색감은 쓸쓸함을 자아냈지만, 그로부터 나오는 분위기도 꽤나 즐길만했다. 곧, 그 분위기는 영화 <미드나잇인파리>와 <레이니데이인뉴욕>에서 등장인물이 비를 맞으며 잿빛 거리를 걷는 장면을 떠오르게 했다.
젖은 바르셀로나의 안에서 나는, 오웬 윌슨이 되고 티모시 샬라메가 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