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셀로나와 작은 간판
난폭한 피로의 행패에 의식은 완전히 제압되어,
기억의 변방으로 끌려갔다.
그것들은 티비 속의 등장인물처럼 약간은 기묘하게 보였다.
인생은 시련 아니, 장난의 연속이다.
첫 숨은 후덥지근했다. 두 번째 숨은 답답하게 느껴지기도 했다.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의 중심도시이다. 관광과 산업을 책임지고 있으며 동시에 파블로 피카소, 아토니오 가우디 등 내로라하는 예술가들의 고향이기도 하다. 그 명성에 걸맞게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스페인 전역에 형이상학적인 건축물이 퍼져있다. 스페인의 소도시 또한 저마다의 개성적인 감성을 가지고 있다.
라는 아름다운 정보를 상기하며 버틴 15시간의 비행과 이틀의 밤샘 그리고 무거운 불안과 기대를 짊어지고 비로소 도착한 바르셀로나 공항은 그야말로 현실 세계 그 자체였다. 멋진 산타는 마땅히 또 당연히 없는 그런 현실 세계 말이다.
언뜻 보이는 바깥은 어두웠다. 텁텁하고 찝찝한 공항의 공기는 방금까지 분명 살아있었던 기대들을 질식시키고, 그 자리에 불안감이 자라도록 했다. 그 불안한 공기는 실제였다. 기분 나쁘게 후덥지근한 공기도 허상이 아니었다.
내가 읊을 수 있는 모든 인종이 거기 한대 모여 있었다. 그 광경을 마주했을 때는 그저 맥락 없이 모여있는 군중들이라 생각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아주 빽빽한 줄로 이루어진 것이 보였다. 어찌나 커브를 많이 돌며 빽빽하게 줄을 서 있던 건지, 옛날에 직접 보았던 어느 아이돌 콘서트의 스탠딩석이 기억날 정도였다. 심지어 입국 인터뷰를 담당하는 공무원은 손가락을 접으며 세는 것이 머쓱할 정도로 적었다. 이렇게나 큰 공항에서, 이렇게나 큰 나라에서 15시간 비행 끝에 마침내 나는, 전혀 원치 않는 스탠딩석에 서서 스타 없는 無를 관람하는 것이었다.
착각했다. 이전에 영국과 프랑스에 들어갈 때는 편하게 기계를 이용했기에 대부분의 유럽 국가들 또한 한국 여권 소지자는 자동출입국 대상자로서 원활한 입국이 가능할 것이라고 착각한 것이다. 내 뒤의 고모와 고모부의 눈치가 보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더욱 불안해졌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 얘기할 뿐이었다. 다행히 그들은 나의 미스를 책망하기보다는 처음 겪는 입국심사에 대한 긴장감 쪽으로 신경을 돌린 듯했다. 그냥 나는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영어를 잘하는 '듯'해 보이는 데에 자신 있는 내가 입국인터뷰를 하겠다고 했다. 하지만, 책임감과 호기심이 어린 얼굴을 한 고모부는 짐짓 단호하게 인터뷰하기를 자처했다. 그는 파파고에 검색한 몇몇 문장들을 진지한 표정으로 암기하고 있었다. 그 비장한 태도는, 수능 국어영역 시작을 앞둔 고3의 모습을 연상케 했다. 인터뷰가 시작되자, 그는 한쪽 팔을 테이블에 올리고 짝다리를 짚으며 자연스러운 분위기를 내기 위해 노력했다. 그 노력이 부자연스러움을 괜히 더 부각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러나 그는 그동안 암기한 모든 스페니쉬 단어들을 사용하여 성공적으로 심사관의 도장을 받아냈다. 약간은 피곤하게 여겼던 것을 '살짝은' 반성하며 공항을 나왔다. 정신줄의 머리채를 잡고 시계를 보니, 현지시간으로 오후 8시를 지나고 있었다. 착륙에서 온 안도감 때문인지 외면했던 피로감이 몰려왔다.
버티자고 생각했다. 그리고 계속해서 상상했다. 이대로 원만하게 예약해 둔 숙소로 가기만 하면 나의 이름을 미리 알고 있는 에어비앤비 호스트가 이미 예전부터 아는 사람인양 나를 반겨줄 것이고, 아주 깨끗하고 흰 침대와 아늑한 숙소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왠지 모르게 바다를 건너오며 몸 구석구석 배어있을 것만 같은 끈적한 소금기를 뜨거운 물로 천천히 씻어낼 수 있다. 그리곤 나는 익숙한 우리 집 냄새가 풍기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포근한 이불속에 파묻혀 영영 잠에 들어버리면 된다. 간단하다.
인생은 시련 아니, 장난의 연속이다.
시위가 일어났다. 인생은 '정말로' 장난의 연속이라고 버스 창문에 기대어 생각했다. 그 고립된 버스 안에서 하나 다행이었던 것은, 고모와 고모부는 앞자리에 앉아서 그 뒤에 있는 나는 잠시나마 표정관리를 할 필요가 없었다는 것이다. 그제야 비로소 정신력으로 잡아끌던 입꼬리를 낮추고 경직된 눈꼬리에 힘을 풀었다. 앞자리 고모의 좌측 얼굴이 차창에 반사되어 내 눈에 들어왔다. 그녀도 나와 같은 표정을 하고 있었다.
택시와 버스로 갈라졌었다. 고모부는 버스, 나와 고모는 택시 쪽이었다. 당연히 택시를 탈 것이라 예상했던 터라 고모부의 의견이 당황스러웠지만, 반박할 체력이 고갈되어 그저 따르는 쪽을 택했다. 어찌 됐건 언젠가는 숙소에 도착할 테니 말이다. 그의 계획과는 다르게 버스는 예정된 시간에 오지 않았고 그렇게 탄 버스는 설상가상으로 시위구간에 노선을 두어, 심각한 교통체증의 한가운데로 영영 들어가 버렸다. 창가에 기대어 버스를 지나쳐가는 사람들을 하릴없이 쳐다봤다. 불쑥 머리를 들이미는 멀미를 의식의 저편으로 애써 밀어내며 창 밖의 강아지와 사람들을 쳐다봤다. 그것들은 티비 속의 등장인물처럼 약간은 기묘하게 보였다.
비슷한 나이대로 보이는 옆자리 여성분이 시위의 상황과 좀 잡을 수 없는 버스 노선을 알려줬다. 경계하면서도 친절한 그녀의 태도에 대해 잠시 생각하다가 관두었다.
버스노선이 예사롭지 않다는 것은 구글맵에 떠 있는 나의 위치로 예상할 수 있었다. 조류에 따라 여러 가지 것들이 이리저리 휩쓸리는 듯, 나도 버스가 표류하는 대로 바르셀로나 한가운데를 둥둥 떠다니는 것이었다.
15분 거리를 장장 한 시간 반이 훌쩍 넘어서야 카탈루냐 광장에 내릴 수 있었다. 카탈루냐 광장이 어떤 의미를 가졌는지, 어떤 모습인지 절대로 나는 음미할 수 없었다. 바닥을 보이는 정신력을 가동하고, 구글맵을 보며 숙소까지의 가장 최단길을 가늠하며 숙소를 찾아갔다. 다행히 카탈루냐 광장에서 아주 가까운 숙소를 잡아놨던 터라,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다만, 변의 길이가 15센티 정도 될 것 같은 정사각형 금속 재질의 간판에 20pt는 될까 말까 하게 숙소의 이름이 적어져 있어, 그 주위에서 또다시 헤매는 시간을 보냈다. 아마 이곳은 아주 오래전에, 바르셀로나 비밀결사대의 밀회 장소였으리라. 그 무리에 어울리는, 아주 눈에 띄지 않는 간판을 걸어둔 장소이니 말이다. 어쩌면 그 간판은 매직아이였을지도 모른다.
스페인의 첫인상을 떠올리자면, 빽빽한 입국심사 줄 보다, 멀미유발 트래픽잼 보다도 바르셀로나 숙소 간판이 제일 크게 생각난다. 어째 기억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그 간판은 점점 작아지는 듯하다.
상상 속의 정이 넘치는 호스트가 아닌 프런트의 차가운 직원이 맞이해 주긴 했지만 숙소는 생각한 것과 비슷하게 아늑하고 깔끔했다. 그것 또한 기억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더더욱 아늑하고 깔끔해지는 듯하다. 그 숙소는 번화가의 중심에 속해있어서 밖의 소음이 아주 잘 들리는 것과 엘리베이터가 1인분 어치의 크기라는 점을 제외하고서는 퍽 괜찮은 숙소였다. 고모가 먼저 씻고 쉬기로 하고 나는 고모부와 숙소 앞의 가게에서 물과 스페인 맥주, 과자를 사서 돌아왔다. 돌아오며 비로소 맞는 스페인의 공기는 공항에서 느꼈던 그것과는 사뭇 다른 시원함이 있었다.
마침내 나는 뜨-거운 물에 몸을 흘려보낼 수 있었다. 오랜 시간을 들여, 끈적하게 붙어있는 몸의 소금기를 흘려보냈다. 그 찝찝함은 뜨거운 물에 서서히 녹아 공항에서의 후덥지근함, 버스에서의 멀미를 비롯하여, 혼란, 당황, 불면, 불안 등의 형태로 하수구 속으로 영영 버려지게 되었다.
상상 속의 그 모습대로, 그리운 집 냄새가 나는 잠옷으로 갈아입고 맥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안도감은 피로의 홍수에 잠식되어 느낄 새가 없었다.
난폭한 피로의 행패에 의식은 완전히 제압되어, 기억의 변방으로 끌려갔다.
아주 난폭한 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