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움의 외피를 덮은 이방인

완전한 이방인과 여행

by 정주구



설렘은 외로움의 외피를 덮어쓴 채 나타난다.


완전히 낯선 곳에서 완전한 이방인이 되어,
외로움을 음미하다 보면
그 풍미에 숨겨진 달콤한 설렘을 맛볼 수 있다.


한낱 츄파츕스 조차도
꼼꼼히 싸여 있는 껍질을 벗겨내는 수고를 해야만,
그 속에 숨겨진 달콤함을 느낄 수 있다.



바르셀로나의 이방인


완전한 이방인이었다,

바르셀로나의 폭력적인 햇빛 아래에서.




톱니바퀴가 끼익 소리를 내며 돌아가기 시작했다. 정말로 끼-익 소리를 내었다. 창자 속 어딘가에 실제로 있는 톱니바퀴의 존재를, 나는 안다. 엔트로피의 법칙에 따라 톱니바퀴는 돌아간다. 태엽을 감아 긴장을 주어야만, 그 긴장이 풀리며 톱니바퀴가 돌아갈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모든 것이 점점 무질서해지다가 결국엔 엔트로피에 법칙에 굴복하며, 운동을 멈추게 된다. 나는 여기서 '태엽을 감는 행위'에 집중한다. 톱니바퀴에 맞는 적절한 태엽을 감는 건, 간혹 쉽지 않다. 그 톱니바퀴가 특히나 그렇다.

이것은 따분한 일상에서는 절대 돌아가지 않고, 그렇다고 해서 여행을 왔다고 무조건 작동되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나는 항상 그 태엽이 감길 때만을 수동적으로 기다릴 뿐이었다. 그래서 꽤 오랫동안 나는 끼-익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21살, 12월 24일, 뉴욕의 한 골목에서, 그 소리를 들었다.

이방인인 상태에서 돌아간다. 꼭 완전한 이방인이 되어야만 한다. 완전한 이방인이 되었을 때의 외로움, 설렘, 두려움, 무력감, 그것들은 한데 뭉쳐져 어느 창자 속에 흘러들어 가, 태엽을 감으며 '그' 톱니바퀴에 긴장을 주는 것이다. 까다롭게도, 그로부터 여러 해가 지나는 동안 어떤 여행에서도 나는 그 예민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리를 들을 수 없었다. 청록색, 감색이 뒤덮일 정도로 어마어마하게 녹슨 톱니바퀴를 올려다보는 상상을 할 뿐이다.

돌아와서 생각해 보니, 이번 여행에서도 오직 그 순간에만 나는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흔히, 설렘은 외로움의 외피를 덮어쓴 채 나타난다. 완전히 낯선 곳에서 완전한 이방인이 되어, 외로움을 음미하다 보면 그 풍미에 숨겨진 달콤한 설렘을 맛볼 수 있다.

나는 그런 류의 외로움을 사랑한다. 대면하면 대면할수록 달큰한 맛이 나는 그런 외로움 말이다. 혹자는 혼자 하는 여행에서 외로운 감정 때문에 그저 마음고생을 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면 나는 몇 가지 질문을 던지고 싶다. 그 외로움 안에는 순수한 외로움만이 있었는지, 혹시 외로움을 음미해보진 않았는지, 그 마음고생이라는 게 사실은 거대한 톱니바퀴가 돌아가는 소음이진 않았는지. 나는 같이 생각해보고 싶다. 한낱 츄파츕스 조차도 꼼꼼히 싸여 있는 껍질을 벗겨내는 수고를 해야만, 그 속에 숨겨진 달콤함을 느낄 수 있다.




지나가는 타인들도 나에게 잠시 머물다 가는 외지인이 되고, 나를 지나치는 풍경과 그 풍경 속의 나 자신 또한, 여행의 상실 속에서 한 부분이 된다. 나만의 거대한 상실에서 한 부분이 되는 것. 그때의 감각만이 '그' 톱니바퀴의 태엽을 감을 수 있다. 톱니바퀴의 울림은 불멸을 꾀하며, 주위 톱니바퀴들의 태엽을 감는다. 온몸 구석구석에 있는 그것들이 돌아간다. '그' 태초의 톱니바퀴는 나를 살게 하는 것이다.




바르셀로나의 격렬한 햇빛 속에서,

나는 완전한 이방인이 되어 있었다.




사그라다 파밀리아 성당 중심에 있는 작은 조각상
격렬한 햇빛에 흠뻑 젖은 바르셀로나
햇빛에 젖은 바르셀로나는 이렇게나 풍부한 색감을 가지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