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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주구 May 18. 2023

느린 아이

엄마, 머리는 가장 나중에 트인대!



한 학년의 최고 반수가 3개였던(시골 아님. 암튼 아님)

00시 최고, 중심, 명문 초등학교의 교문 앞에 30대 후반의 여성이 하염없이 서 있다.


"어? 주구 어머니 안녕하시렵니까. 꽤 오랫동안 학업을 핑계로 인사드리지 못해 죄송합니다. 잘 지내셨지요?"
"그래그래 얘들아, 안녕. 혹시 주구는 왜 안 나오는지 아니?"
"주구는 금일 받아쓰기 40점. 무려 최저점. 가히 이번 학기 하한가라고 말씀드릴 수 있는 점수를 기록해서요. 지금-"
"신나니?"
"지금- 깜지 쓰고 있어요. 무식한데 성실하다 보니, 아주 작은 글씨로 빽빽하게 쓰고 있더라구요. 종이가 이-만큼이나 큰데요."
"..."
"요즘 많이 힘드시죠? 하지만 저희는 믿습니다. 이 또한 지나가리라는 것을요. 힘내세요~"
"놀리는 거 같은데?"
"봄날의 따사로움 속에서 항상 건강하시고 가정에 평안이 가득하시길 기원합니다."
"얘 의도적인데?"




"엄마~(하며 달려온다. 짧은 다리를 열심히 굴러 달려간다)"
"주구야~ 받아쓰기를 왜 그렇게 많이 틀렸어?~ 엄마랑 어제 연습했잖아~"
"아~ 그거~ 엄마 있잖아~ 머리는 가장 나중에 트인대!"
"하하호호 우리 딸 말도 잘해~"




애석하게도 스물 중반인 지금까지도 머리는 안 트였고, 말만 잘한다.


...


실은, 말싸움으로 누구를 이길 자신도 없다. 받아쓰기 40점을 받은 10살 정주구 조차도 이길 수 없으리라. 해서, 그냥 말을 할 수 있는 정도..라고 정정해야 할 듯하다.


잠시 휴지를 가지러 가야겠다. 이놈의 눈물.. 아니 콧물.

요즘은 슬프면 콧물이 그렇게 난다. 없어 보이게 쓰리.


초등생 시절 6년 중 5.5년을 전망 좋은 곳에서 보냈다. 

교장선생님과의 아이컨택 속에서 나는 흐트러지지 않은 차렷자세로 아침 조례를 견뎌내야 했다.

뒷 쪽의 아이들처럼 스믈스믈 짝다리를 짚거나 하는 건 꿈도 못 꿨다. 눈치 보는 습성을 아마 그때 터득했지- 싶다.

이 세상의 미래이자 중심인 어린이 여러분들! 눈치 보는 어른으로 자라고 싶으면 밥투정 부리고, 과자만 먹고, 우유는 입에도 대지 않으면 됩니다~ 아셨죠? 그렇게 해서 앞자리를 쟁취하면, 운동회 할 때 부모님이 사진 찍기가 참 쉬워요~ 비록 눈치 보느라 김치-도 못하고 차렷자세인 사진뿐이겠지만~

 

계속 장난치면 독자들이 나를 가벼운 사람으로 여길 것 같아 그만해야겠다. 나는 원체 진중한 사람이니, 가벼운 '척'은 그만하도록 하겠다.

이 글을 쓴 이유는 따로 있다. 이렇게나 느린 나의 잊지 못할 친구. 그 친구에게 하고 싶은 얘기가 있기 때문이다. 잊을 수 없는 친구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도 이름과 생김새를 기억할 수 있을 정도니. 받아쓰기 40점 맞은 그 당시의 나의 사고력으로 한 친구의 모습을 저장해 두는 게 얼마나 쉽지 않은 일인지, 아마 많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그 친구가 없는 유년시절은 감히 상상하기도 싫다. 그와 함께라면 나는 짧은 생에 전혀 느끼지 못했던 이루 말할 수 없는 자유로움을 느낄 수 있었다. 그와 함께라면 나는 눈치를 내려놓고, 어색하게 짝다리도 짚고, 새천년 체조도 대충 하고, 운동회 때 자랑스럽게 브이를 할 수 있었다. 비록 사진에는 내가 아닌 그 친구에게 포커징이 되었지만, 전혀 섭섭하지 않았다. 


현아야 잘 지내니? 너 없었으면 6년 내내 가장 작은 사람이 될 뻔했다. 아찔하지. 비록 반이 바뀌고 나는 또다시 1등을 면하지 못했지만. 행복했어. 근데 그거 아니? 나 그때 키 잴 때 양말 2개 신었다. 수면양말로다가. 섭해말어. 약육강식의 세계란 그런 거지 뭐 허허. 그래서 너 지금 키 몇이니?




약육강식의 세계에서 느린 나는, 피라미드의 하층에 있는 피식자가 된 것일까.

5살까지 젖병과 기저귀를 떼지 못했고 한글, 구구단 할 거 없이 모두 평균보다 적어도 1년은 늦게 깨우쳤다. 키도 학급에서 가장 작았고 제대로 된 연애도 늦게 했다(이건 아닌가). 또 13살까지 침대에 소변을 누었고, 겁이 많아서 14살까지 엄마랑 같이 잤다.


이제 사람들은 기대할 것이다. 

그런 느린 아이가 도대체 어떻게 대성했는지 궁금해하며 글을 읽고 있을 것이다. 


놀랍게도, 

나는,

스물 중반의 나 정주구는,





갑자기 눈물이 흐른다. 이번엔 콧물이 아닌 눈물이다. 극적인 반전을 찾으려고 했는데, 없다. 그저 방금 몇 분 동안 키보드에 손을 올려둔 채로 얼음이 되어있었다. 아무도 땡을 해주는 사람도 없어서 속으로 땡을 외쳐야만 풀려날 수 있었다.

 

나는 키 작고, 잘 울고, 화도 잘 내고, 생각이 짧고, 겁이 많았다.

그리고,

나는 키 작고, 잘 울고, 화도 잘 내고, 생각이 짧고, 겁이 많고, 말싸움도 못한다.


고새 하나가 늘어버린 것 같아 슬프다.

'머리는 가장 나중에 트인대요!' 하며 해맑게 받아치는 받아쓰기를 못했던 10살의 주구가, 그로부터 이모뻘이 된 나이에도 여전히 머리가 트이지 않았다는 걸 알지 않았으면 하는 마음뿐이다.




가령 어떤 총명한 과학자가 10살의 자신을 단 몇 분 동안 독대할 수 있는 기술을 개발했고, 우연히 그 기술 시연회에 당첨이 되어 나에게 기회가 주어졌다고 상상했을 때, 나는 10살의 정주구를 똑바로 볼 수 있을까? 시나는 어린 주구의 질문에 사실대로 답해야 할 것이다. 거짓말도 제대로 못하니까.



주구야 미안한데, 언니는 아직까지도 머리가 트이지 않았어. 울지 마, 언니도 울고 싶어.



그럼 어린 주구는 실망한 눈치겠지. 그럼 나는 이렇게 얘기할 것이다.



근데 주구야, 네가 지금 느리다고 생각하는 부분들 말이야. 느려도 꽤 괜찮더라? 내가 그리 많이 살진 않았지만, 살다 보니 정말 중요한 부분에서 본인이 느리다는 것도 인식 못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정말 많더라고. 근데 나는 내가 부족한 부분들을 잘 알아. 너무 잘 알아서 탈 일 때도 더러 있지만은, 느린 걸 아는 사람이 빠를 때가 분명 있더라고. 



그럼 어린 주구는 잘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느리니까.



위로가 될 말을 해줄까? 음- 언니는 여전히 겁이 많지만 혼자 해외여행도 몇 번 다녀왔고, 여전히 눈치를 많이 보지만 그마저도 헤아려주는 속 깊은 친구들이 있고, 언니는 대학 졸업하고 그 누구보다 빨리 취업해서 그 누구보다 빨리 승진하고 꽤 오래 회사 다니다가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됐고 주식 정보나 알려달라고? 너 이 놈 주식에 손도 대지 말거라 이 놈! 패가망신 지름길이다 이 놈!



상상은 결국 어린 주구를 더럽힌다. 불경한 늙은 주구야, 어린 주구는 주식 같은 건 물어보지도 못할 만큼 느리단다.



아무튼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아서 마지막으로 얘기해 줄게. 
주구야, 
너는 느리지만 느슨하지 않고 
더디지만 결코 헐겁지 않은 어른이 된단다.


주구야, 너는 정말로


과거의 나를 쳐다볼 수 있는


그런 어른이 돼.


이렇게나 똑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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