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건을 비우고 나면 빈 공간이 남는다.
한시적으로 오고 가는 물건에 비해 공간은 항구적이다. 배는 오고 가도 항구는 영원히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비어진 공간 또한 그 자리 영속적으로 존재한다.
이렇듯 비우고 나면 물질 뒤에 흐르고 있는 본질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화려하고 매혹적인 물성에 뺏겼던 마음이 하나 둘 걷히면서 삶의 중요한 진실이 다가온다.
잡동사니가 굴러다녔던 집이 깨끗해지듯 잡념이 가득하던 마음 또한 맑아진다.
군더더기 없는 삶의 테두리는 인생에서 잊고 있던 중요한 부분들을 들추어낸다.
변하는 수많은 물성을 뒤로하고 변하지 않는 지성 같은 근본적인 것에 관심이 옮겨간다.
이전에는 '어떻게 많이 벌고 많이 소유하는 것'에 초점이 맞춰줬었다면, 9년의 비움을 보낸 지금은 '어떻게 원하는 삶을 살 것인가? 진정 내가 원하는 것은 무엇인가?'로 바뀌었다.
이런 사유들은 자연스레 내면으로 파고들게 하고 '나'와 더 가까워지는 통로가 되었다.
결국 비움은 나를 둘러싼 외부에서 시작해 내면으로 들어가는 여정이다.
삶이 '나를 만나는 긴 여행'이라고 한다면 비움은 이 여행을 즐기는 하나의 방식일 뿐이다.
물건 하나하나 비우면서 환경을 통제하고 널뛰던 마음까지 바로잡아 나간다. 마음이 고요해지면 '진짜 나'를 만나게 된다. 이 여행의 끝에는 '나' 자신이 기다리고 있다.
비움은 단지 이 여행을 이어가는 하나의 방식이다.
여행에 다양한 방법이 존재하듯 삶의 여행 또한 꼭 '비움'으로만 고집할 필요는 없다.
다만 '비움'이 이 여행의 좋은 방식임에는 변함이 없다.
물건을 비울수록 물질에 메여있는 집착을 비우면서 마음 또한 조금씩 내려놓게 된다. 나와 '나'사이 가로막고 있던 것들을 비우고 나면 나는 '나'와 가까워질 수밖에 없기에.
삶의 주인공은 바로 '나'다. 비움을 하기 전에 나는 '나'가 되지 못했다. 나는 주인공 보다 단역에 가까웠다. 누구의 삶도 아닌 나의 삶이란 무대에서 나는 자주 잊혔고 자주 외로웠다.
비움을 시작으로 '나를 만나는 여행'에 올라타고부터 서서히 '나'를 되찾아갔다.
'나'를 위한 거절의 언어를 배웠고, '나'를 위한 꿈 꾸는 용기를 품었고, '나'를 위한 다정한 배려를 행하게 되었다.
덕분에 초라한 객석에서 반듯한 무대를 누비는 삶의 주인공이 될 수 있었다.
물론 그렇다고 내 삶이 화려해졌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늘도 보통의 하루가 펼쳐지고 있다. 이 단촐하고 소박한 무대일지라도 오롯이 '나'로 누리는 단단한 충만함이야말로 나를 지탱하는 삶의 뿌리가 되어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