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행을 떠나는 오전 작은 캐리어를 꺼내 짐을 싼다. 혼자 떠나는 여행이기에 짐을 다 싸는데 몇 분이 채 걸리지 않는다. 4인 가족 여행의 캐리어를 쌀 때와 대조적이다.
혼자서 감내할 수 있는 양과 무게만 담게 된다.
순도 100퍼센트 혼자만의 시간이 이 여행의 목적지이다. 바다만큼 어울리는 곳도 없다.
전면의 탁 트인 창으로 청아한 고성의 바다가 물결친다. 늦가을 모래 위 애틋한 연인들의 걸음이 쌓인다.
짐을 풀고 파자마로 갈아입는다. 파자마는 본격적인 휴식의 신호이다. 보호받는 쉼은 안전하다.
파자마를 입고 침대 안으로 파고든다. 두 팔을 활짝 펼치고 넓은 침대를 맘껏 소유한다. 깍듯한 사각사각 소리가 만져진다. 가장 설레는 순간이다. 오직 나만을 위해 준비된 공간과 시간이 비현실적이다.
한껏 뒹굴거리다 침대 위에 책 탑을 쌓는다. 블루투스 스피커에 플레이리스트를 튼다. 베개에 등이 파고들고 읽고 싶던 소설책을 읽기 시작한다. 시원한 캔맥주를 홀짝홀짝 곁들이면서 책 속으로 여행을 떠난다.
중반부에 들어설 때쯤 하겐다즈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집에서라면 아이들에게 항상 뺏겨버리는 아이스크림. 혼자서 여유롭게 달콤한 바닐라 맛을 즐긴다.
다시 책을 읽다가 해가 질 무렵 반신욕을 시작한다. 산으로 스미는 석양과 밤의 불빛들이 반짝거린다. 마음 벽 쌓인 먼지 한 톨까지 깨끗이 정화된다.
반신욕을 하고 머리를 말리기 전, 룸서비스를 주문한다.
머리를 다 말리고 책을 읽고 있으면 똑똑 도착한다.
나를 위해 차려준 한 끼 식사를 바라보고 있으면 감사한 마음이 절로 든다. 결혼을 하고 한 끼를 차린다는 게 얼마나 손이 가고 힘 드는 일인 줄 알아버렸기에.
혼자만의 저녁 식사를 마치고 객실 앞에 빈 그릇을 둔다. 설거지하지 않아도 되는 기쁨은 의외로 크다.
어느새 달빛 가루가 담긴 파도가 치고 있다. 커튼을 치고 은은한 조명을 남겨두고 또 책 속으로 떠난다.
긴 공백없이 장편소설을 읽을 수 있는 시간. 누구의 방해도 없이 책을 볼 수 있는 느긋한 시간만큼 호사도 없다.
다 읽어갈 때쯤 꾸벅꾸벅 졸다가 잠이 드는 밤.
다음날 저절로 눈이 떠지는 아침.
커튼을 열어보니 연한 체리빛 바다가 인사한다.
부지런한 뒷모습 몇몇이 아침 산책을 하고 있다. 이 풍경을 바라보며 사과를 먹는다. 껍질째 사과를 한입 베어 물다 울컥한다. 1박 2일간 보낸 시간이 스친다. 이게 뭐라고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걸까!
목숨 같은 아이들은 천사들처럼 사랑스럽다. 여기까지 쓰면 분명 행복해야만 한다. 하지만 아이 둘의 엄마가 되고 나는 행복하지 않았다. 엄마로 지내는 나는 행복했지만, 나로 존재하는 자아는 행복하지 않았다. 마음은 바람난 튜브처럼 낮지만 끊임없는 소리로 빠져나갔다.
이 구멍을 막기 위해 나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했다. 딱 하루만이라도 온전히 나 자신으로 존재하고 싶었다.
물건을 비우기 시작하고 삶에서 불필요한 생각들 또한 비워갔다. 덕분에 나 혼자 여행을 떠나지 못할 이유 또한 사라져갔다.
아이에게만 선물을 주고 축하해 주는 대신 나에게도 축하하기로 한다.
처음 두려움에 떨며 엄마가 되었던 나를 기억한다.
처음 이어서 힘들었던 마음에게 선물을 준다.
하여 매해 가을과 겨울 사이, 내가 처음 엄마가 된 시절이 오면 나 혼자 여행을 떠난다.
이 여행은 반창고가 되어 구멍 난 마음을 막아준다. 작은 삶이 커진다.
나의 가치를 올린 만큼 더 큰 가치가 삶을 두드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