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기도 집 이사날짜가 정해졌다. 작년 9월 초 속초에 집 계약을 하러 왔다. 예전부터 읽어보고 싶었던 책을 들고서. 바다를 보며 읽으면 더 좋을 것 같아서 숙소에서 시간이 나는 틈틈이 읽어보았다. 이 책에는 저자의 꿈인 '슈필라움'을 완성해가는 과정이 담겨있다. (슈필라움-주체적 공간, 독일어 '놀이'와 '공간'이 합쳐진 말로, '여유 공간'이라 번역할 수 있다고 한다) 여수 어느 섬에서 자신만의 슈필라움,'바닷가 작업실'을 만들어간다.
저자는 책에서 이야기한다. 삶에서 자신만의 '좋은 것'을 찾으라고. 그는 자신만의 '좋은 것' 여수 바다 앞의 미역 창고를 찾아낸다. 우리 가족만의 '좋은 것'을 찾아 신랑은 11년 다닌 첫 직장을 퇴사했다. 우리만의 '좋은 것'을 찾기 시작하고 보니 '좋은 곳'이 따라왔다. 퇴근시간의 통치 아래 회색의 무거운 일상에서 벗어나 여유로운 삶을 바라보자 여유 로운 공간, 슈필라움이 필요로 다가왔다.
어렸을 때부터 당연하게 살아왔고 항상 함께였던 서울. 서울에서 그나마 한적한 주거단지 밀집지역인 동쪽이었다. 결혼하기 전 지금은 친정으로 불리는 이 곳. 전철, 은행, 대형마트와 영화관 각종 편의시설이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다. 백화점 대형 서점도 차로 10분이며 어디든 가깝고 편하다. 갈수록 버스노선과 지하철 노선도 늘어가고 있다. 차가 없어도 일상생활에 전혀 불편함 없는 곳이다.
이십 대에 대학을 졸업하고 도전해보고 싶던 사업을 했다. 2년간 열심히 영혼까지 쓸어 담아 미친 듯이 일만 했다. 덕분에 원하던 목표 달성과 번아웃도 함께였다. 일 공백의 허무함을 감싸며 쉼을 위해 호주로 향했다.
첫 해외여행이었다. 캐리어를 끌고 홈스테이 집을 찾아가는 길에 길에서 눈이 마주친 호주 아저씨가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순간 당황한 나는 "헤~~ 엘로~~" 얼버무렸다. 속으로 '나를 아는 사람인가?!' 생각과 함께 신기해했다. 호주에 처음 머문 곳은 브리즈번에서도 차로 1~2시간 들어가면 있는 '누사'라는 곳이었다.
치열했던 시간을 떨쳐내고 한적한 쉼을 누리고 싶었던 내게 최적의 장소로 보였다. 쥐라기 공원에 나올 것 같은 커다란 초록의 원시림 같은 나무들이 공원에도 길에도 머문 집 마당에도 함께였다. 2~3층의 고급 주택들이 대부분으로 부유한 한적함이 물씬 동네를 감싸고 있다. 바람에 일렁이는 나뭇잎들에도 열기에 달궈지는 대지 위에도 덩실덩실 구름들을 옮겨가는 푸른 하늘 안에도 지나가는 사람들의 옅은 웃음 뒤에도 느린 여유가 묻어 나온다.
랭귀지 스쿨 수업이 끝나면 집으로 돌아와 비키니를 입고 큰 비치타월을 덮고 신발 없이 바다로 떠난다. 도보로 10분도 안 걸리던 가까운 곳에 이름도 예쁜 선샤인 비치가 있다. 발바닥을 타고 올라오는 대지의 뜨거운 열기에서 낯선 자유가 느껴진다. 어린 시절 맨발로 뛰어놀던 천진난만한 무질서가 선샤인 비치로 이끈다.
"비키니에 맨발로 비치타월만 걸치고 걸어간다고?!" 타인의 시선 아래 갇혀있던 억압이 가벼워진 차림처럼 내 살갗을 벗어난다.
편의시설이라고는 중심가의 가게들 십여 개가 전부이며 딱히 할 곳도 갈 곳도 없는 시골이다. 오후 6시가 되면 거의 모든 가게들이 문을 닫고 가족과의 저녁을 맞이한다. TV에는 재미있는 프로그램이 그닥 없어 여기 사람들은 TV도 한국만큼 즐겨보지 않는다. 가족들과 집 마당에서 공원에서 바비큐 파티를 즐긴다. 한가로운 낮이나 주말에는 가볍게 걸치고 햇빛이 반짝이는 아름다운 해변으로 향한다. 끝없이 펼쳐지는 지평선 위에 손에 잡힐 듯 가까이 놓여있는 하늘색 하늘 아래서 오롯이 바다를 소유한다. 지금껏 한 번도 경험해보지 않은 것처럼 바다가 새롭게 이름을 쓴다. 그동안 단지 좋아했다면 선샤인 비치와 4달간 시간은 바다와 사랑에 빠지기에 충분했다. 모래에 부딪혀오는 파도 따라 열정의 이름 아래 찌들어있던 내부의 껍데기들이 허물을 벗어갔고 새로운 세계가 다가왔다.
호주에서 4달의 시간은 2년으로 늘어났고, 2년은 나의 삶을 지배해간다. 2년이 지나고 여름이 다가올 때마다 해가 바뀔 때마다 꿈이라는 단어를 만날 때마다 선샤인 비치의 빛나던 은빛 향들이 공기를 타고 나를 간지럽힌다. 그럴 때면 당장 비행기 티켓을 끊고 그 바다로 달려가 안기고 싶어 진다. 짙눌렸던 통제의 질서들을 벗어던지고 맨 바닥으로 작열하는 태양의 열기를 느끼며 자유를 온몸에 덮고 싶어 진다.
속초 1년 살 집을 계약하고 단지를 둘러본다. 속초의 유독 가까운 하늘이 눈에 들어온다.
"오빠~속초 하늘은 왜 유독 가깝게 느껴지지?"
"하늘이 맑아서 그래~~ 공기가 맑을수록 하늘이 더 잘 보이고 가까이 보이잖아"
올려다보는 하늘에서 호주의 느리게 지나가는 구름들이 겹쳐진다. 한여름밤의 꿈처럼 추억되는 호주의 슈필라움을 영혼 깊이 품고 있어서일까, 속초의 낮은 하늘과 한적한 바닷바람이 나를 우리 가족을 속초로 당겨온 것이 느껴지는 순간이다. 우리 가족의 삶이라는 배경 속에서 머물 집과 속초라는 도시 또한 우리만의 슈필라움으로 추억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