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로소 원하던 일상의 리듬

by 주하

속초로 이사 오기 전 두려운 날들이 있었다. 비 오는 날과 매서운 한파가 덮치는 날이었다. 수도권에서는 차로 20분이면 아이와 실내 갈만한 곳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비가 올 때나 아주 더울 때나 추울 때면 차를 끌고 근처 대형 쇼핑몰이나 도서관, 백화점 등에 가서 아이와 안락하고 편하게 실내에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동해바다, 설악산&청대산, 청초호&영랑호, 가까이 펼쳐친 푸른 하늘이 늘 곁에 있는 속초지만 대형 쇼핑몰이나, 백화점 등 어린아이와 갈만한 실내장소가 거의 없다.


작년 10월 속초에 이사 오고 한 달 정도 지나고 두 번째 태풍이 찾아왔다. 한 달 동안 태풍만 벌써 두 번째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안전 안내 문자만 8개가 쌓여있었다. 바닷가 근처에 살고 있다는 게 생생하게 실감이 되었다. 주변의 우려와 달리 두 번째 태풍은 잠잠하게 지나갔다. 태풍은 지나갔지만 일기예보는 한 주 동안 비 소식이 이어졌다. 11개월 꼬맹이와 신랑이 퇴근하기 전까지 종일 같이 있어야 하는데 종일 비가 오면 아기와 집 안에만 있어야 한다.



바람이 잠잠해진 걸 확인하고 차를 타고 밖으로 나왔다. 11개월 꼬맹이와 갈만한 곳을 고르고 골라 정한 곳은 바다정원 카페. 4층에 루프탑까지 있는 대형 카페다. 규모가 커서 실내공간도 넓고 쾌적하고 3층에는 따로 키즈존이 있다. 나무 바닥에 좌식으로 앉을 수 있고 여러 가지 아이들이 놀만한 장난감들도 비치되어있어서 주말에 종종 가서 시간을 보내곤 한다. 비가 오기에 유모차 대신 아기띠에 꼬맹이를 안고서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카페로 들어갔다. 빵과 음료수를 주문하고 3층에 자리를 잡으려고 둘러보았다. 관광객으로 보이는 가족과 현지인 엄마들과 아이들 무리가 보였다. 비 오는 평일 낮이어서 사람들이 많지는 않았다. 그래서인지 옆 테이블 엄마들의 대화 소리가 상세하게 다 들려왔다.


"우리 아파트에 요즘 들어 벌레들이 왜 이렇게 많이 보이는지..."

"그렇지 우리 동도 그래, 벌레 때문에 골치 아프다니까"

다행히 우리 가족이 터 잡은 아파트가 아니어서 안심이 되었다. 아파트 이야기부터 아이들 육아문제 등등 사소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여기저기 기어 다니는 꼬맹이를 돌보면서도 그 엄마들 이야기들이 귀에 계속 전해왔다. 한쪽에 아이 둘 부부 가족은 아이 아빠와 엄마가 다정하게 아이들과 놀아주고 있었다.

'꼬맹이 아빠도 아이와 잘 놀아주는데...' 괜히 회사에서 일하고 있는 신랑이 보고 싶어 진다.


치킨버거를 좋아한다. 자주 먹다 보면 빵과 치킨들은 언제나 비슷한데 그사이에 끼어있는 양상추는 때에 따라 자주 바뀐다. 싱싱하고 탱탱한 양상추가 있는 치킨버거가 있고 모든 수분을 빼앗겨 흐물거리는 양상추가 있는 치킨버거가 있다.

그렇게 30분 정도 지났을까, 순간 치킨버거 사이에 끼어있는 흐물거리는 양상추가 된 기분이었다. 버거와 치킨 중간에 끼여있는 느낌이었다. 속초 현지인도 관광객도 아닌 수분기 잃고 축 처진 양상추 말이다. 치킨버거 사이에 흐물거리는 양상추를 빼고 먹듯이, 나는 부랴 부랴 짐을 쌓고 카페를 나왔다.


밖에는 아직도 비가 왔고 아직도 아이와 단둘이 보내야 하는 시간은 많이 남았다. 집에서 도보로 10분 거리에 있는 시립도서관으로 향했다. 속초에 이사 오고 유모차를 끌고 꼬맹이와 일주일에 적어도 2번 정도는 방문하고 있는 곳이다. 유아존도 잘되어있고 책도 다양하게 비치되어있어 애정 하는 공간이다. 비 오는 도로 위를 20분 정도 열심히 달려 도착했다. 뜻밖의 상황이 펼쳐진다. 주차할 곳이 없는 것이다. 10분 정도 돌고 돌아도 보이지 않았다. 차를 잠시 정차하고 숨을 골랐다. 속에서 뜨거운 물방울들이 눈밖으로 나오려는 것을 간신히 밀어 두고 집으로 향했다.



짐을 풀고 아이와 단둘이 거실 창가에 앉았다. 11개월 꼬맹이는 비가 내리는 창밖이 신기한지 가만히 바라본다. 그 시선을 나도 같이 따라간다. 그렇게 아기와 함께 가만히 바라보았다. 그제야 감고 있던 눈이 떠지고 닫고 있던 귀가 열린다. 추적추적 내린 비로 거리 위는 어두운 색을 입고 있고 하늘은 구름 색으로 가득하며 창문에는 빗방울들이 매달려있다.


창문에 부딪히는 비와 바람의 소리, 방울방울 매달리며 맑게 빛나는 그림들, 작게 열어 놓은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비 담긴 바다의 향이 말을 걸오 온다. 다시 눈을 뜨자 알게 되었다.


비 오는 날이면 아이와 함께 종일 집에 있기 힘이 든다. 그래서 넓고 편한 실내공간에 나가서 시간을 보내다 와야 한다. 나에게는 넓고 편한 실내공간이 꼭 필요하다.


이 강박관념에 쌓여있었고, 두려움이 있었다는 것을.


이 사실을 깨닫자 신기하게도 비에 먼지가 씻겨 내려가듯 두려움 또한 잦아들었다. 마음이 편안해지고 아이와 단둘이 비 오는 날 집안에서의 시간을 즐기게 되었다. 꼭 아이와 일상에만 해당되는 게 아니었다. 30 몇 년을 수도권에서 살아오며 몸에 뵌 것들이었다. 주말이면 꼭 어디를 가야 하고 무엇을 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이 사로잡고 있었다. 수도권에서의 삶은 평일에 항상 치열하고 바쁘게 흘러갔기에 그나마 쉴 수 있는, 무언가 맘 놓고 할 수 있는 시간이 생길 때면 꼭 특별한 곳에 가서 무엇을 해야만 보상받는 기분이었나 보다. 그렇게 바쁜 휴식을 주말을 여가를 채워갔었다.


이 억눌린 생각들에서 해방되자 비로소 원하는 일상의 리듬을 찾아가고 있다. 비가 오는 날이면 아이와 함께 비 속에서 비와 물의 소리를 느끼고 비에 어우러진 바다향을 맡으며 비에 젖어든다. 주변 상황에 쫓겨 지내는 일상이 아니라 오롯이 나만의 시간 우리의 시간만이 흘러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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