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켓이 없는 삶

by 주하

길을 잃고 나서야 다시 말하면 세상을 잃어버리고 나서야 비로소 우리는 자기 자신을 발견하기 시작하며,

우리의 위치와 우리의 관계의 무한한 범위를 깨닫기 시작한다.-<월든> 데이비드 소로


1845년 소로는 조용한 숲 속에 둘러 쌓인 월든 호숫가에 오두막집을 짓고 살기 시작한다. 밭을 일구며 소박하고 조용한 자급자족의 생활을 2년간 이어간다. 문명과 멀리 떨어진 숲 속에서 생활하며 자연과 교감하고 정직하고 소박한 육체노동을 선호한다. 인생의 본질적인 사실들만 직면하며 살아보고자 자연품의 하루 속으로, 자신의 내면 속으로 걸어갔다.


속초로 이사 오고 소로처럼 의도하지 않았지만 문명과 멀어진 두 가지가 있다. 로켓 배송과 새벽 배송이다. 수도권에서는 저녁 10시까지 주문하면 다음날 아침 일찍 물건을 받아볼 수 있었다. 로켓 배송을 처음 주문한 날의 느낌이 생생하다. 신생아에게 필요한 육아용품이 갑자기 떨어진 것을 알고 급한 마음에 로켓을 클릭했다. 저녁 9시 50분 아슬아슬하게 주문 완료를 누르고 다음날 아침 문자를 받고 문을 열어보았다. 현관문 앞에 필요했던 물건이 떡 하니 와있었다. 10시간도 채 안돼서 벌어진 일이었다. 필요했던 물건의 공백 없이 여유롭게 아기를 케어할 수 있었다. 속도의 단맛을 느낀 뒤로 물건이 급히 필요할 때건 급하지 않을 때건 로켓 배송과 새벽 배송을 즐겨 사용하기 시작했다. 로켓이 발사되지 않을 때만 아쉬워하며 일반 배송 페이지를 기웃거렸다. 보통 배송도 빠르면 하루 만에 받아보지만 몇 시간 차이라도 그 간극은 컸다.


이미 여러 가지 경험을 겪었기에 어느 정도 예상은 했었지만 막상 '서비스 외 지역'이라는 글자와 마주하자 당황스러웠다. 어쩌겠는가, 속초에서 1년 살기를 마음먹고 이사까지 왔는데 받아들여야지....

그렇게 10개월 아기 엄마의 로켓 없는 삶이 시작되었다. 몇 번 보통 배송으로 주문을 하고 받아보았다. 속초로 로켓만 뜨지 않는 것이 아니었다. 문명세계에서 누렸던 일반 배송도 여기서는 늦어지기 일 수였다. 이틀은 기본이고 늦으면 3~4일까지 지연되는 일이 종종 일어난다. 서울이나 경기도였으면 배송에 문제가 생겼나 의문이 들 정도의 시간이 여기서는 자연스러운 일상이다. 로켓을 타고 다니다가 경운기로 옮겨 탄 기분이랄까....




이 신선한 속도의 급변을 느낀 경험이 한번 더 있었다. 10년 전 호주에 어학연수를 하러 갔었다. 지내고 있었던 셰어하우스에 인터넷이 고장 나고, 호스트 언니에게 인터넷이 언제쯤 다시 연결될지 물어보았다. 돌아온 대답은 '한 달쯤'이었다. 동그란 토끼눈을 하고 있는 나에게 언니가 말했다.

"호주는 뭐든 느려, 공공 서비스 신청하면 넉넉히 한 달은 기다려야 돼~, 호주는 인터넷 속도만 느린 게 아니야, 신청할 때도 as 받을 때도 엄청 느리지..."

한국에 있을 때는 바로 다음날 받아볼 수 있었던 서비스가 호주에서는 한 달이나 걸렸다.


이는 비단 공공서비스에만 국한된 건 아니었다. 처음 호주에 도착했던 날이다. 호주땅에 발 디딘 지 몇 시간도 안돼 길에서 처음 마주친 아저씨가 웃으며 건넨 인사말 "Hello~".

나는 혹시 다른 이에게 인사했나 주변을 멀뚱멀뚱 둘러보기만 했다. 그랬다. 그 인사는 처음 보는 나에게 건넨 것이었다. 그 뒤로도 길에 처음 마주친 사람들이 웃으며 인사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길에서 실수로 상대방과 살짝 부딪혀도 바로 웃으며 "Sorry~" 사과를 하는 사람들. 평일 점심시간에는 햇살 좋은 공원 풀밭 위에 늘어져 휴식을 취하는 사람들. 그 사람들을 둘러싼 즐비해있는 초록 나무들, 낮고 푸른 하늘, 넓은 대지를 타고 한적한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속초에서 유난히 가깝게 느껴지는 푸른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10년 전 호주가 드리운다. 경운기를 타는 불편함에 한동안 몸은 덜덜덜 거렸지만 일상은 속도를 점점 늦춰갔다. 호주의 길과 사람들 속에 흘러가던 시간의 결이 이곳에서도 피부에 스며들기 시작했다. 세탁기 호스 연결 부품이 자신에게 있다며 선뜻 차로 다녀와 설치해주고 가신 건조기 설치기사님, 엘리베이터 안에서 먼저 자주 인사를 건네는 이웃분들, 따스한 일상 이야기를 여유로이 건네던 은행원 아주머니, 아기랑 왔다고 수프와 빵을 하나씩 더 챙겨주시는 사장님.....

깊고 넓은 동해바다, 가까이 접할 수 있는 청초호와 영랑호, 이를 둘러싼 초록 초록 공원들, 병풍처럼 곳곳을 두르고 있는 설악산과, 청대산 그리고 낮고 푸른 하늘이 가까이 있어서일까.

이들에게 자연의 시간이 흐르고 있다. 이들을 둘러싼 아름다운 자연에서 흘러나온 여유로움이 속초 곳곳에 따스한 5월의 햇살처럼 내리쬐고 있다.


삶에서 로켓이 없어지고서 시간이 부족해지기보다 오히려 늘어났다. 더 빨리 빨리라는 부스터를 떼 버리자 하루하루가 천천히 흘러가기 시작했다. 자연에 둘러싸인 이곳에서 자연과 가까워지며 자연의 시간을 배우고 있다. 그렇게 자연과 닮아갈 수 록 나를 찾아가는 기분이 든다. 소로가 월든에서 느꼈던 기분도 이랬을까?

어느덧 이곳에서 두 번째 5월을 기다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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