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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Aug 27. 2021

나의 녹차 아이스크림은 어디로 갔을까

몇 주 전 베스킨라빈스 쿠폰이 생겨 다녀왔다. 아이스크림 케잌 쿠폰을 파인트와 블록 팩으로 주문하려니 십여 개의 맛을 골라야 했다. 무인기기 앞에서 한참 고민을 하고서야 주문을 눌렀다. 뜨거운 열기로 혹여라도 녹을까 봐 드라이아이스도 두둑이 넣고 가득 채워진 백을 들고 가게를 나서는데 문득 생각 하나가 스쳐 갔다.

'나도 녹차 아이스크림 좋아하는데, 그 많은 맛 중에 녹차 맛 하나 고르지 않았네, 나의 녹차 아이스크림은 어디로 갔을까?'

예전부터 아이스크림을 먹을 때면 녹차 아이스크림 먼저 고르고 그다음에 나머지들을 채워나갔다. 그랬는데 어느새 그 자리가 딸기, 바닐라, 초코, 딸기, 바닐라, 초코가 차지하고 있었다.

아이의 취향으로 뒤덮여 있는 영수증을 바라보는데 그 순간 왜 이렇게 서럽던지.... 영수증 보고 울고 싶었던 적은 처음이었다.

'한두 개도 아니고 이렇게 많은 맛들을 고르며 어떻게 하나도 녹차맛을 고르지 않았던 거지!' 그랬다. 무인기기 앞에서 길게 늘어선 선택의 빈칸들을 아이가 어떤 맛들을 좋아할까? 어떤 맛들을 골라가면 잘 먹을까? 여기에만 집중하고 발 둥둥거리며 채워가기 바빴다. 그 사이에 나의 취향은 들어갈 자리가 하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생활 주변을 돌아보았다. 비단 아이스크림만이 아니었다. 아이가 태어나고 '나'에서 '엄마'가 되면서부터 일상 곳곳에 아이의 색들로 채워지고 있었다.


5년 전부터 미니멀 라이프를 지향하면서 TV까지 치우며 거실이 넓고 산뜻해져 갔다. 소파와 작은 책장이 거실 가구의 전부였는데 한가운데 딱 하니 버티고 있는 대형 점퍼루, 그 옆을 굴러다니는 장난감들. 얼핏 보면 아담한 키즈카페처럼 보인다. 음색이 좋다고 해 구입한 신혼 가전 야마하 오디오로 카를라 브루니의 노래를 들으며 커피를 마시고 책을 읽는 시간이 좋았는데. 이제는 아기 상어가 흘러나오고 아이들과 놀아주기 바쁘다.

첫째가 말이 트여 의사소통이 가능해지면서 아이의 취향이 가족의 취향을 대변해갔다. 한가로운 시간 바깥에라도 나갈라치면 아이에게 먼저 묻는다. '오늘은 어디 가고 싶어? 뭐 하며 보낼까?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아이의 대답에 행선지가 정해지고 그곳에서 가족의 시간을 보낸다. 아이들이 커가는 꽃 같은 시간들을 놓치기 아쉬워 카메라를 계속 들이민다. 핸드폰 사진첩에 2천 장이 넘는 사진들 속에 나의 사진은 정작 손으로 꼽을 만큼 적다는 사실에 차가운 아이스크림을 많이 먹었을 때처럼 마음이 시려온다.


생선 박사라고 부를 정도로 생선을 좋아하는 첫째 꼬맹이. 음식을 잘 먹어도 살이 잘 안 찌는 채질이어서 마른 편이다. 밥을 유독 잘 안 먹는 날이면 또래 친구들 사이 하늘하늘 거리는 몸이 나 때문인 것 같아 마음이 쓰인다. 그러다 보니 함께 먹는 식단은 항상 아이 입맛을 향해 있다. 어떻게든 잘 먹이고 싶고 또래 친구들처럼 포동포동 살찐 모습을 보고 싶은 엄마의 마음 이리라. 이런 아이가 좋아하는 생선을 구운 날이면 그나마 먹던 밥도 못 먹기 일수다. 조기 4마리를 구우면 기본 3마리가(어떤 날은 전부) 그 작은 입으로 흡입된다. 엄마 아빠는 번갈아가며 생선 바르기에 정신이 없다. 아이가 먹다 남은 조기나 먹지 못하는 딱딱한 부위를 먹고 있을 때면 친정 엄마가 생각난다.



                     

어렸을 때 생선과 함께 했던 식사들을 떠올려본다. 엄마는 언니, 오빠, 나의 밥그릇 위에 생선을 발라주기 바쁘다. 생선의 몸 살이 다 우리 입으로 사라지고 난 뒤에야 엄마는 생선 머리 부분을 먹기 시작한다. 하루는 어린 내가 엄마를 보고 물었다.

"엄마는 왜 맨날 생선 머리 부분만 먹어?"

"모르는구나, 원래 생선은 이 부분이 가장 맛있는 거야"


그때는 정말 엄마가 생선 머리 부분을 좋아하고 맛있어서 그 부분을 먹는 줄 알았다. 세월이 흐르고 두 아이의 엄마가 되어 나의 아이에게 발라주는 생선의 가시가 쌓일 수 록 친정엄마가 나를 위해 발라줬던 가시들이 느껴진다. 조기를 나도 좋아하면서 아이가 먹는 모습에 몇 번이고 마른침을 삼키며 질긴 부분만 씹을 때면 엄마가 오래전 넘겼었던 비릿한 생선 머리 맛이 느껴지는 듯하다. '엄마도 분명 부드럽게 잘 넘어가는 몸통 부분을 먹고 싶었을 텐데... 우리 삼 형제를 위해 머리 부분을 좋아하고 있던 거였구나...' 나의 엄마도 , 자신의 생활을 '아이들'의 취향으로 덮어버리고 질기고 거친 부분을 씹고 있었구나... 지금의 나처럼.

그래서일까, 자식들이 다 크고 어느덧 부모가 되고 아이들이 낳은 아이들의 할머니가 된 친정엄마와 식사 때 생선이 나올 때면 열심히 집중하는 모습이 눈에 띈다. 할머니가 돼서야 자식들 눈치 안 보고 생선 몸통부터 집중하며 먹는 걸 볼 때면 엄마의 따스하지만 쓸쓸한 비늘 맛이 느껴진다.




흰머리 가득 할머니의 모습으로 생선을 즐기기에 나는 '나'를 더 사랑하나 보다. 아이에게 생선의 모든 몸통 살들을 내어주기보다는 '나'자신을 위한 생선도 미리 준비해두고 싶다. 아이에게 주고 난 나머지가 아닌, 나를 위한 생선을 먼저 구워야겠다. 아이스크림을 먹으러 갈 때도 녹차 아이스크림 먼저 고르고 아이들의 맛들로 채워야겠다. 아이들의 노래를 듣더라도 가끔 엄마가 좋아하는 노래는 '~이거야' 하면서, 함께 나의 노래도 틀어야겠다. 아이들처럼 성장하지는 않을지라도 나의 지금도 영원히 한번뿐인 꽃 같은 순간들이기에, 순간순간 사진으로 추억해야겠다. 아이가 '엄마~엄마' 수십 번 부를 때면, 엄마도 엄마만의 시간이 필요해하고 나만의 시간을 지켜야겠다. 아이들이 나의 '전부'가 아닌 언젠가는 곁을 떠날 '부분'임을 받아들이고 마음을 비워가야겠다.

내가 나를 지키지 않으면 '나'는 어느덧 희미해지고 어느 날 '엄마'로만 남아 있을 것 같기에. 그 순간 삼켜야 할 쓰디쓴 맛을 감내할 자신이 없기에. 내가 나를 지키고 나를 더 사랑하고 나를 더 찾아줘야겠다. 그리고 나의 엄마를 더 자주 그리워해야겠다. 함께 보냈던 그 시간들도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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