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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Nov 28. 2023

글쓰기 책 100권보다 필요한것




지금까지 글쓰기 관련책만 100권 정도 읽어보았다. 그중 소장하고 있는 장서로 17권이 있다.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글을 잘 쓰고 싶은 마음이 커져갔고, 그 마음이 글쓰기 책에 고스란히 투영되었다.

글쓰기책을 읽고 있으면 나도 금세 글을 잘 쓸 수 있을 것 같은 용기가 생기고, 자극이 되었다. 

그 생각들로 인해 도서관이나 신간코너에 글쓰기책이 보이면 바로 흡입했다. 그렇게 지난 8년간 읽은 글쓰기 책이 100권 정도 쌓였다. 그리고 곁에 17권이 남아있다.

이 중 1권만 고른다면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가 되겠다. 이 책으로 글쓰기에 꼭 필요한 스킬과 진정성에 대해 배울 수 있었다. 한 번도 만난 적은 없지만 마음속에 품고 있는 나의 글쓰기 멘토님이다. 글쓰기가 답답할 때면 꺼내서 멘토님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마음을 가다듬는다. 

글쓰기책을 읽어온 지 8년이 지났고, 지난 시간들을 돌이켜 본다. 8년 전으로 돌아갈 수 있는 타임머신이 내게 있다면 그때로 돌아가 쓰기의 책을 딱 1권만 읽겠다.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만 소장하고 틈날 때 자주 조금씩 읽어보겠다. 나머지 99권을 읽는 시간에 노트북부터 켜고 무조건 아무 이야기라도 쓰기 시작하겠다.






식상한 표현이긴 하지만 뱃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으로 간다는 말이 있다. 생각이 많아질수록 머릿속 뱃사공들이 늘어난다. 내가 가려는 곳은 태평양에 있는 하와이인데, 머리에서 떠들어대는 뱃사공들이 많을수록 배는 바다로 가기는커녕 애먼 산으로 향한다. 왜 생각은 행동에 이런 영향을 미칠까? 생각을 하다 보면 자동적으로 부정적인 요소들이 침입하기 쉽다. 


내가 하와이에 갈 수 있을까?

하와이에 가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근데 뱃멀미는 하지 않으려나?

동해바다에서 태평양까지 노를 저어 가려면 얼마나 걸릴까?

혹시 태풍이라도 만나서 배가 난초 되면?

고래밥이 되어 고래뱃속에 들어가면 피노키오를 만날 수 있을까?


같이 생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점점 바다가 아닌 산으로 향한다. 글쓰기 책을 읽을 때마다 분명 나도 이들처럼 잘 쓸 수 있는 날이 오겠지, 나도 할 수 있다, 그래 매일 기록해 보는 거야! 같은 용기와 새로운 다짐을 얻는 긍정적 작용을 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와 더불어 위에 나열한 것처럼 '글쓰기를 잘하려면~~~ 해야 한다'같은 조건들이 뇌에 쌓이고, 이 지식은 하나하나 캐릭터가 있는 검열자가 되어 머릿속 뱃사공으로 정착한다.


A4의 하얀 화면을 연다. 글을 쓰려고 키보드를 두드리려고 하면 몇 자 쓰지도 않았는데 검열관 A가 이야기한다. '제목은 글의 첫인상이야! 이 제목은 너무 밋밋해. 한 번에 독자를 사로잡아야 한다고! 다시 해봐!

1시간 정도 제목을 고민하다 마침내 마음에 드는 제목을 한 줄 쓴다. 첫 문단을 쓰려고 또 몇 자 적고 있는데 이번엔 검열관 B가 나타난다. '첫 문장도 제목만큼이나 중요해! 

'국경의 긴 터널을 빠져나오자, 눈의 고장이었다.' 설국의 첫 문장 생각나지? 네가 반해서 몇 번이나 필사했던 문장이니까. 첫 문장은 이렇게 강렬하게 흡입하는 힘이 있어야 해! 얼마나 멋진 문장이야~첫 문장 하나로 설국의 하얀 이미지가 단번에 시각화되잖아. 자, 이제 너 차례야!.'

이때부터 첫 문장을 생각하다가 또 1시간이 흐른다. 처음 쓰려던 문장과 별반 다르지 않은 평범한 문장을 써가면서 몇 줄 조금 쓰다가 지쳐서 노트북 화면을 닫아버린다. 


그리고 좌절모드를 이겨내기 위해 다시 글쓰기 책을 읽는다. '나는 왜 안되는 걸까? 글쓰기 책을 더 읽어야겠어!'라고 속삭이면서. 정작 가장 문제가 내부의 검열관에 있다는 걸 모른 채로, 글쓰기를 잘하려고 읽는 지식책으로 인해 쓰기와 더 멀어지는 모순이 이어지는 것이다.

불과 얼마 전까지 내가 해왔던 삽질 아니 노질이었다. 나의 배는 내가 가고 싶은 태평양 하와이는커녕 물기 하나 없는 이름 모를 산속만 헤매고 있었다. 

하다못해 읽고 소장한 글쓰기책 제목 중에 <책 읽지 말고 써라>도 있다. 물고기가 자신이 물에 둘러싸여 있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그 상황에 빠져있으면 자신을 객관화하기 어렵다. 그때는 읽지 말고 무조건 써라! 카네기홀로 가는 지름길은 없다!라는 작가들의 충고가 흡수되지 못하고 둥둥 분리되었다. 


8년이 지나고 100권의 쓰기 책을 읽고, 내부 검열관 10명 정도와 사투를 벌이고 나서야 알게 되었다. 쓰기란 머리로 쓰는 것이 아니라 몸으로 쓰는 것이라는 것을. 100개의 명문장을 머리에 채우는 것보다 단 1개의 그지 같은 문장이라도 직접 써보는 게 훨씬 쓰기에 도움이 된다는 것을. 나의 몸으로 직접 체감하지 않으면 그건 언제까지나 내 것이 아닌 남의 것이다. 눈으로 아이스크림 100개를 뚫어지게 바라본들 시간이 지나면 사르르 녹아 사라진다. 직접 내 입에 넣어 차가운 감촉을 느끼고 달콤한 미각을 느껴봐야 아이스크림을 소유할 수 있다. 

해서 나는 이제 아름다운 아이스크림이 담긴 카탈로그는 덮어두고서, 초라하고 별볼것 없는 아이스크림일지라도 하나하나 직접 입에 넣어 먹어보기로 했다. 진득하니 앉아서 한 개 한 개 개별의 맛들을 느긋하게 즐기기로 했다. 

이렇게 마음먹기 시작하자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내면에 오랜 기간 상주하고 있던 검열관들이 하나 둘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는 것이다. 물론 그들은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언제고 불쑥 튀어나와 나에게 속삭일 것이다. '이것보다 더 잘할 수 있는데? 당장 처음부터 다시 써! 역시 넌 못해. 쓰기랑은 멀어' 같은 말들을.

그럴 때면 이제 지긋이 두 눈을 마주하고 말한다.

"알겠어. 하지만 지금 나는 아이스크림을 즐기는 중이야. 화려한 아이스크림이 아니라도 좋아. 나는 아이스크림 자체를 좋아하거든. 그러니 방해하지 말아 죠!"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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