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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하 Dec 01. 2023

무해한 하루

100살이 넘은 내게 건네는 질문



따뜻하고 포근한 이불이 우리를 감싼다. 익숙한 공간인 우리 집, 우리 안방에서 오늘도 잠을 청한다.

하루의 일상을 마치고 자리에 누워 눈을 감는다. 이 날따라 그동안 삶이 스쳐 지나간다.

내가 어렸을 때 엄마 무릎에 앉아 함께 책을 읽던 모습

내가 엄마가 되어 아이들을 무릎에 앉혀 함께 책을 읽는 모습

내가 자라면서 아이에서 어른이 되는 모습

나의 아이들이 아기에서 어른으로 자라 가는 모습

우리 가족이 이곳저곳 여행 다니면서 추억을 쌓는 모습

이 모든 모습들이 필름처럼 깜깜한 영상위를 지나간다.

나는 평생의 친구이자 동반자로 이 모든 여정을 함께한

그의 손을 잡는다. '이때 생각나?' 하면서 우린 함께 웃는다.

우리는 그동안 정말 고마웠어요. 사랑해요.라고 말을 건네며 서로를 살포시 안아주며 잠이 든다.




내가 그리는 생의 마지막 모습이다. 이 모습을 그려보는 것은 호상을 꿈꾸는 욕망도 있겠지만,

이렇게 시간 타임머신을 타봄으로써 느끼는 효과이다. 마지막 순간을 하나하나 세세하게 떠올리다 보면

오늘을 바라보는 프레임이 달라져있다.

100살이 넘은 할머니인 내게 질문한다. "지금 과거로 돌아갈 수 있다면 가장 돌아가고 싶은 순간은 언제일까요?"

"우리 아이들이 막 세상에 눈을 뜨고 새싹처럼 깨끗하고 순수한 눈으로 싹을 틔우는 시기"

바로 내가 글을 쓰고 있는 지금이다.

"더 젊은 20대가 아니고요?" 내가 그녀에게 묻는다.

"20대의 젊음도 좋지만 그럼 지금의 소중한 아이들을 만날 수 없잖아."

그녀가 생생한 눈동자와 함께 옅은 미소를 띠며 말한다.


이 대답을 듣고서 눈을 뜬다. 눈앞에 속눈썹이 천사처럼 내려앉아있는 아이의 숨결이 반짝인다.

일어나서 나와 눈이 마주치자 배시시 웃는 모습에 맨 처음 갓 세상에 나온 아기의 낯빛이 겹쳐진다.

아무 조건 없이 나에게 전하는 사랑의 온기만큼 무해한 것도 없다. 나는 그런 아이들을 살포시 안아준다.

미래의 내가 그토록 갖고 싶은 오늘, 지금 이 순간을, 그녀를 대신해 더 소중히 소유하고자.


아이들의 아지랑이 같은 손을 꼭 잡고서 원에 보내고, 뒷모습을 눈에 한번 더 담은 뒤 집으로 돌아온다.

환기를 위해 열어둔 창밖으로 윤슬이 피어있는 바다가 보인다. 바람결에 나부끼는 하얀 시폰커튼이 태양빛을

조각조각 떨어뜨린다. 창가에 그대로 앉아 차갑지만 상쾌한 아침의 온도를 피부에 얹어놓고 바다와 하늘의

지평선을 가만히 바라본다. 어느새 눈동자에도 겨울의 색이 가득 담긴다.


그녀에게 또 질문을 한다. "살면서 가장 후회되는 일은 뭐가 있어요?"

"보다 나 자신을 믿어주지 않은 것, 남 신경을 덜 쓸 것. 하루를 더 소중히 여기지 않은 것"

라고 그녀가 대답한다.


그녀의 대답에 나의 지난 시간을 돌이켜 본다. 원고를 쓰면서도 하루에 몇 번이고 불쑥 튀어나오는 말들,

'내가 작가가 될 수 있을까? 지금 쓰고 있는 이 글들이 의미가 있을까? 남들이 내 이야기를 좋아해 줄까?'

등등 요 근래 나를 옭아 매고 있는 마음속 상념들이 떠오른다. 등원길에 6살 첫째에게 매일 같이

'넌 할 수 있어! 너는 최고야! 너는 뭐든 할 수 있어!'라는 용기의 말을 북돋아 주면서 정작 나 자신에게는

믿어주는 말은커녕, 가장 홀대했다. 글을 발행하고 올릴 때면 항상 따라오는 두려움, 남들의 시선과 인정들이

나를 더 작게 만들었다. 그랬기에 가장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도 마냥 순수히 즐거워하지 못했다.

내가 정작 나에게 가장 해로웠던 것이다. 아이들과 가족들, 친구들에게는 항상 응원의 메시지를 듬뿍 담으면서도. 나 자신에게는 그러질 못했다. 는 사실과 마주하자 나에게 미안했다.


사과하기에 가장 자연스러운 행위는 상대에게 맛있는 요리를 해주는 것이지 않을까. 해서 나를 위해 요리를 했다. 잘 차려 먹을 때도 있지만 요즘 들어 바쁘다고 대충 때워먹던 점심을 푸짐하게 차렸다. 잘 차려먹어도 원푸드 식단으로 했지 이렇게 반찬 여러 개와 국을 차리는 일은 거의 없는데. 괜히 마음이 울컥한다. 내가 나를 이렇게 챙기지 않았구나. 싶은 마음 때문에.

멸치육수 낸 물에 된장 두 스푼, 감자, 애호박, 두부를 송송 썰어 넣어 폴폴 끓인다. 아무리 끓여도 예전 엄마게 나에게 해준 집 된장찌개 맛이 나진 않는다. 텅 빈 집 식탁에서 된장찌개를 한 두 숟가락 먹고 있자니 나의 엄마가 떠오른다. 어느새 하얀 눈이 머릿결 위에 소복이 내려앉은 그녀. 기억 속 지금 내 나이일 때 엄마 얼굴을 꺼내본다. 단발기장에 웨이브 한 머리에 쌩긋 웃고 있는 그녀의 얼굴이.

전에 엄마에게 물어본 적이 있었다. "엄마는 과거로 돌아갈 수 있으면 언제가 가장 좋아?"

"지금 너 나이 때. 너희들이 어리고 나도 젊었던 시기. 몸도 씽씽하고 어디든 떠날 수 있는 가벼운 마음까지"

라고 엄마가 대답했다.

"그럼 엄마가 가장 후회되는 일은 뭐야?"

"너희들 키울 때 마음에 여유가 없었어. 그래서 자주 사랑한다고 말 못 해준 거. 더 못 사랑해 준 거..."

라는 대답과 함께 전화기 너머로 "사랑해, 주하야. 이렇게 엄마 마음 잘 알아줘서 고마워..."

라는 말이 들려왔다.


누군가가 가장 돌아가고 싶은 순간을 살고 있다는 실감은 먹먹함을 자아낸다. 그동안 손위로 빠져나갔던 모래알들처럼 건조했던 하루하루가 떠오른다. 무엇을 그렇게 꼭 손에 쥐고 있었기에 빠져나가는 모래알들을 제대로 보지 못했을까.라는 생각이 들자 두 손 꼭 쥐고 있던 힘이 느슨해진다. 손바닥을 펼치자 그제야 그 안에 들려있는 모래알 하나하나가 들어온다. 아주 작고 하찮은 모래알 하나가, 할머니가 된 나와 나의 엄마까지. 그녀들이 그토록 바라던 순간들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이제 더 이상 작고 하찮지가 않다.


손에 힘을 빼고 손바닥 위에 올려진 모래알들의 하나하나 모양과 빛에 반짝이는 모습을 보기 위해 나는 시간 타임머신을 타곤 한다. 미래의 그녀가 전해주는 반짝이는 안경을 쓰기 위해서.

이 안경을 쓰게 되면 지진하던 오늘은 소담하지만 소중하고, 무해한 하루야말로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이구나.라는 생각을 떠오르게 해 준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나 자신을 믿어주는 것, 남의 시선은 멀리하고서.'라는 작은 되뇌임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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