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동네 산책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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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 덕후 희망자의 도시 집착- 3
우리 동네 산책법
이사 온 지 어느덧 10개월이나 되었다. 뭔가 아직 이 동네에 대해서 잘은 몰라 일단 적으면 무언가 나오겠거니 했지만, 금방 밑천이 드러나버렸다. 동네에 대해 아는 것이 아직 많지 않다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는다. 그래서 우선은 10개월 동안 탐색한 우리 동네 산책법에 대해서 적어보려고 한다. 너무 일상적이라 도시 덕후라는 제목이 괜히 부담스럽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뭐 될 때까지 그런 척 만드는 수밖에 fake till make it. (도시 덕후에 걸맞은 도시 글은 뭘까나,.)
우리 집은 런던 그리니치와 뎁포드 사이에 있다. 집에서 나와 길 하나 건너면, 뎁포드이고 다른 쪽으로 돌리면 그리니치이다. 이 두 동네는 갸우뚱할 정도로 극과 극의 분위기를 가지고 있다. 나와 남편도 각각 다른 목적으로 각각의 동네로 향한다.
우리집은 그리니치 구에 세금을 내고, 쓰레기도 그리니치 구가 수거해 간다. 그래서 누가 런던 어디 사냐고 물으면 그리니치에 살고 있다고 한다. 그리니치는 '그리니치 천문대'로 잘 알려진 세계 시간을 표시하는 GMT 할 때 그 G의 '그리니치 Greenwich'이다. 시간의 시작(?)이라고 하는 곳이다. 주변에는 옛날에는 왕가의 사냥터였던 그리니치 공원도 있고(1800년대부터 지금까지 대중에게 공개되어 있는), 그리니치 왕립 해양 박물관도 있는 뭔가 왕립스러운 로열 Royal과 관련된 역사가 많다. 공원 앞, 교회 주변의 시내 건물들도 1700-1800대의 조지안 양식으로 굉장히 '영국 스러운' 분위기이다. (이 주변은 1830년에 Joseph Kay가 왕립 병원을 위해 주변 도시 개선 계획의 일부로 당시에 개선했다고 한다.) 이런 배경이기에 런던 중심가와 어느 정도 거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주변에 관광객이 꽤 많고, 중저가의 호텔 체인점들도 줄지어 있다. 현재 시내 상점은 체인점으로 채워져 있어 우리는 체인점에 가야 할 때나 공원 산책을 갈 때 그리니치 쪽으로 향한다.
한편, 길 하나 건너면 뎁포드이다. 그리니치의 작은 시내 건너편에 위치한 뎁포드는 낙후된 동네였다가, 최근에 이런저런 재미있는 상점들이 이민자 사이에 자리 잡으면서 힙해져 버려, 젠트리피케이션이 진행되고 있는 그런 느낌의 동네이다. 역사적으로도 뎁포트는 부두와 조선소의 노동자들 중심으로 형성된 가난한 동네였다고 한다. 전해 듣기로는 그리니치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뎁포드에 살았다고도 한다. 그리니치와는 분위기가 많이 달라, 바로 옆에 위치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서로를 잇는 다리가 오래도록 없었다고도 한다. 뎁포드 중심가는 이민자의 상점들로 가득 차 있다. 중국, 베트남, 터키, 아프리카(어느 쪽 아프리카였는지 잘 모르겠다)를 포함하여 왠지 날 것의 느낌의 생선, 정육점, 등등이 가득 차있다. 길 한가운데에는 시장이 일주일에 세 번씩 열리는데, 여기서 과일, 생필품, 천 등등 다양한 물건들을 판다. 체인 음식점이 아닌, 좀 더 다양한 종류의 음식을 먹고 싶을 때, 펍에 갈 때, 아시안 음식재료를 사거나 생필품 사러 갈 때 우리는 주로 뎁포드로 걸어간다.
처음 집을 보러 왔을 때 우리는 뎁포드 중심가를 지나 현재 살고 있는 집에 도착했었다. 여기저기 지역을 애정하는 듯한 지역 커뮤니티 활동의 흔적이 여기저기서 보였다. 오래되고 버려진 듯한 건물인데, 뭔가 사람들이 모여서 뭔가 하고 있을 듯한 귀여운 간판들과 포스터들이 길 사이, 유리문 너머, 벽에 붙어있는 것이 종종 보였다. 중간중간 커뮤니티 센터도 포착할 수 있었다. 이민자들이 운영하는 음식점, 미용실, 상점 사이사이에 작은 규모의 양조장, 비밀스러운 레스토랑 증의 독립 가게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는 느낌이었다. 내가 듣기로는 뎁포드는 재생 대상 지역이었고, 2-3년 전까지는 탑 다운 Top-down 방식의 개발에 반대하며, 지역 사람들의 목소리를 반영한 개발에 대한 목소리를 내기 위해 여러 풀뿌리 활동들이 여럿 있었다고 했다. 그렇게 지역 주민들이 함께 운영하는 영화관도 있었다고 한다. 지역 주민들의 목소리와 활동을 상세하게 기록한 아니타 스트라서Anita Strasser의 책 ‘뎁포드는 변하고 있다’ (Deptford is Changing: A Creative Exploration of the Impact of Gentrification) 덕분에 알게된 사실이다.(기록이 얼마나 중요한가!) 지금은 영화관은 없어졌지만, 우리가 이사 왔을 때엔 크라우드 펀딩 한 칵테일 바가 새로 오픈 준비를 하고 있었다. 한편 현재 뎁포드 주변으로 많은 집합 주택을 짓는 공사가 한창이다. 산책하면서 동네가 변하고 있는 것을 (혹은 변화하지 않는) 보여주는 흔적들을 찾는 것을 좋아한다.
우리가 자주 산책 가는 또 다른 방향은 그리니치 공원 뒤쪽의 황야 Black Heath이다. 이곳은 켄트 Kent로 향하는 도로를 가운데에 두고, 갑자기 건물 하나 없는 황야(?) 혹은 평야가 펼쳐지는 곳이다. 그 너머에는 상점들이 작은 상업지역을 옹기종기 모여있다. 이 작은 시내는 그곳에는 우리가 좋아하는 소규모 양조장에서 만든 다양한 맥주가 구비되어 있는 펍이 있기도 하고, 도시보다는 아기자기한 영국 남부, 서섹스 Sussex 마을 느낌이 드는데, 남편이 자란 동네랑 분위기가 비슷하다. 중고 가게에는 구석에 숨어 있던 좋은 아이템이 왠지 많을 것 같은 분위기이다. 건물 하나 없는 널찍한 황야를 보며 걷는 것도 그냥 좋다. 한국에서는 이렇게 넓은 평지를 본적이 별로 많지 않은 것 같다. 도시에서 걸리는 것 없이 이렇게 멀리 볼 수 있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도 하다. 날이 따뜻할 땐 여기로 소풍 오는 사람들도 많다. 우리 집에서 조금은 멀어서, 좀 더 시간과 마음에 여유가 있을 때, 놀러 온 친구들을 데리고 동네 산책을 갈 때, 이쪽으로 발걸음을 한다.
이 동네에 한동안 살았던 친구가 놀러 와서는 기웃거려 볼 재미있는 동네 커뮤니티가 이곳저곳에 있다고 하더라. 지역 주민이면 무료로 공예를 배울 수 있는 곳도 있다던데, 목공이나 메탈 작업도 가르쳐주는 곳이 있으려나. 차근차근 탐색 중이다.
특정 층위만 골라서 이미지를 만들고 싶었는데, 하다가 막혀서 만들고 싶었던 과정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미지 마무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