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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엄 Mar 26. 2023

축제라는 변명으로

제주들불축제(2)

  햇살이 내리쬐는 가운데 셔틀버스에서 하차했다. 제주 시내와 행사장을 오가는 셔틀버스가 있다는 게 뚜벅이들에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자차가 있더라도 들불 축제 기간에 새별오름 일대는 마비가 될 정도로 차량이 많으니 셔틀버스를 이용하는 게 좋다는 것이 경험자들의 말이다.


  주차장에서 축제장으로 걸어 들어가는 길, 멀리서부터 보이는 천막들의 개수가 축제의 규모를 가늠케 했다. 마침 '집줄놓기' 경연대회가 벌어지기 직전이었는데, 이 알 수 없는 이름의 행사가 도대체 들불축제와 어떤 연관이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일단 모인 사람들 사이로 기웃거렸다. 각 읍면동이 적힌 팻말 아래 선수들(주로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모여있었고 네모난 모양으로 줄을 친 간이 경기장 주변으로는 관객들이 몰려 있었다.


  주최 측은 집줄놓기 대회의 심판을 소개했는데, 제대로 듣지는 못했으나 그의 약력을 간단히 소개한 것으로 보아 꽤나 공신력 있는 집줄놓기 심판이었던 모양이다. 그는 자신의 집줄놓기 대회 심사 기준에 대해 관객들을 향해 선포했다. 정확한 시간 내에 만들어내는 스피드, 완성된 집줄의 심미성, 팀의 화합과 단결(정확히는 "옷을 맞춰 입는다거나"라고 했다.) 등이 모두 심사의 대상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은 팀 중 유일하게 옷을 맞춰 입지 않은 팀 내에서는 즉시 분열이 일어나기 시작했고, ("내가 옷 맞춰야 한다고 했잖아!") 옷뿐 아니라 신발까지 맞춰 신은 팀들은 자신들의 단결을 뽐낼 줄 알았으나 이번에는 전략과 포지션을 논의하느라 분연히 목소리를 내고 있었다.("이걸 미리 준비해놔야 한다고!")


  혼란하고 소란스러운 와중, 이를 감지하고 호기심을 느낀 사람들이 모여 점점 관객이 많아졌고 간이 집줄놓기 경기장은 알 수 없는 열기로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집줄놓기가 대체 뭐기에 이렇게 진심인 걸까 싶어 점잖게 팔짱을 끼고 이 모든 혼란을 관망하던 한 할아버지에게 접근해 물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집줄은 초가집이 날아가지 않도록 묶던 밧줄을 의미한다. 집줄놓기는 이 밧줄을 만드는 것으로, 육지에서는 짚을 사용했지만 제주에서는 '새'라고 불리는 풀을 말려 사용했다고.


  아하! 그러니까 지금 초가지붕이 날아가지 않도록 묶어두는데 사용한 밧줄 만들기 대회를 하고 있는 것이로구나. 대회장에 흐르는 이 긴장감과 긴박함의 이유라기에는 너무도 생활내 가득한 행위에 붙은 '경연대회'라는 말이 어쩐지 낯설었다.


  하지만 원래 축제란 그런 것이 아니던가. 전통을 이어간다는 구색을 가지고 있지만 실은 거대한 스케일의 불놀이인 것(이라고 생각한다)에 열광하는 것처럼 어떤 것도 놀이가 되고 컨텐츠가 될 수 있는 흔치 않은 순간 말이다.


  경기의 시작을 알리는 총성과 함께 팀별로 호흡을 맞추기 위해 외치는 소리와 훈수를 두는 관람객 소리가 어우러져 들끓었다. 대회에 진지하게 참여하는 사람들도 신기했지만, 어디선가 나타나 훈수를 두는 관람객들의 존재도 놀라웠다. 도대체 이 사람들은 다 어디서 온 것인가. 복장과 신발까지 맞춰 신고 집줄놓기를 연습하는 사람들과, 집줄놓기 대회에 훈수를 두는 사람들이 있었다니.(훈수를 둘 만큼 '집줄놓기'에 대해 알고 있다니!) 느슨하게 꼬인 줄에 한 마디씩 훈수를 두고, 툭툭 끊기는 줄에 탄식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어느새 나도 한마음이 되어 내가 살고 있는 동네 선수들을 열렬히 응원하고 있었다.


출처: 원성심, "제주들불축제, '집줄놓기' 경연...최고 고수는 누구일까", 헤드라인 제주, 2023.3.10


  집줄은 '뒤치기'라는 갈고리 모양의 도구와 '호렝이'라는 구멍이 뚫린 도구를 이용해 만든다. 한 명이 뒤치기에 새를 걸고 빙글빙글 꼬아가며 뒤로 천천히 물러나면, 다른 한 명이 호렝이를 사용해 줄 끝부분에 새를 이어 붙여 길어지는 식이다. 그러니 뒤치기를 든 사람과 호렝이 사이로 새를 넣어 꼬는 사람의 호흡이 중요한데, 새가 충분히 모이기 전에 뒤로 너무 빠르게 물러나면 줄이 끊어지기도 했다.


  경기가 막바지에 다다르자 선수들의 조바심 나는 마음에 불을 붙이는 환호성이 경기장 한 구석에서 터져 나왔다. 외도동 대표로 나온 백발의 한 할아버지가 미친 듯이 집줄을 놓기 시작한 것이다. 뒤치기를 든 사람도 이에 맞춰 빠르게 뒤치기를 돌리며 뒤로 물러나기 시작했고 순식간에 줄이 길게 꼬아졌다.


  집줄을 튼튼하게 만들기 위해 같은 길이의 집줄 두 개를 만들어 엮어야 했는데, 백발의 노장이 기마자세를 유지한 채 손으로 두 개의 줄을 꾹꾹 눌러가며 단단하게 엮어나가자 관객들로부터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막바지에 팀 선수들이 경직되기 시작하자 "자 다들 긴장 풀고!"라고 외치며 사기를 북돋던 모습은 마지막 올림픽 경기에 나선 베테랑 선수를 보는 듯했다.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고, 토너먼트의 다음 단계로 올라갈 팀과 아닌 팀이 나누어졌다. 백발 노장이 속한 팀은 휘슬이 울리기 직전 줄이 끊어지는 바람에 다음 경기의 기회를 얻지 못했지만, 새별오름을 배경으로 환한 미소를 지으며 다 함께 사진을 찍었다. 열정적으로 즐기다 승패에 깔끔하게 승복하고 떠나는 뒷모습에, 생활내 나는 이 전통적인 행위를 놀이로써, 나아가 스포츠 정신까지 담은 '경연 대회'로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내 생애 첫 '집줄놓기 경연대회' 관람이 끝나고 축제장을 돌아다니는데 눈을 의심하는 무언가를 또 발견하고 말았다. 그것은 다름 아닌 '듬돌들기 경연대회'. 무거운 바위를 들고 얼마나 이동할 수 있는지를 겨루는 힘자랑 대회였다. 5분 전에 집줄놓기 경연대회를 보며 했던 생각(세상 무엇이든 놀이가 될 수 있다!)을 곧바로 의심해 보게 만드는(과연 정말 그런가.) 이 원초적인 대회에 이유 모를 거부감과 강한 매력을 동시에 느꼈다.


  여기에도 역시나 제주의 전통이 깃들어 있었다. 듬돌은 마을 장정들이 힘겨루기를 하기 위해 마을 입구에 놓아둔 돌을 말한다. 마을에 큰 듬돌이 있으면 다른 마을 사람들이 함부로 하지 못했고, 작은 듬돌이 있으면 다른 마을 사람들이 거뜬히 들어 올리며 그 마을 청년들에게 창피를 주었다고 한다. 듬돌 들기는 전국적으로 전승되었지만 특히 제주도에서 성행했다고.


  다소 원시적인 힘자랑 대회에 제주들불축제 문구가 적힌 에코백이라는 상품이 더해져 근사한 인기 프로그램이 되었는데, 도전 정신을 자극하는 탓인지 나중에 경품이 동난 후에도 듬돌들기 경기장은 자신의 힘을 시험해 보려는 사람들로 북적였다.


  제주도민도, 옷을 빼 입고 나타난 관광객도, 어른도, 아이들도 하나같이 돌 앞에서 결연한 표정을 지었다. 장갑 낀 손을 털며 준비를 하다가 돌을 지상에서 떼지도 못한 채 민망하게 도망치듯 돌아서는 사람들이 반, 돌을 들고 버거워하다 한 걸음도 옮기지 못하고 다시 내려놓는 사람들이 반의 반이었다. 소수의 사람들만 이를 해냈는데 힘겹게 걸음을 옮길 때면 박수갈채가 쏟아졌다.





  유난히 원시적인 요소가 많이 보이는 축제였다. 축제의 주제인 불놀이도, 집줄놓기도, 듬돌들기도 투박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제주도를 특별하게 만드는 것은 바로 이런 요소들이 아닐까 생각했다. 척박한 환경에서 살아남기 위해 모색한 흔적들, 고립된 섬에서 사용할 수 있던 재료로 만든 생활품, 마을사람들끼리의 단결과 경쟁의식.


  축제가 아니고서라면 어디서 볼 수 있을지 모를, 빛바랜 전통들은 축제 속에서 그 놀이가 태어날 당시의 생명력을 가지고 살아났다. 전통이라는 변명으로 축제를 연다고들 하지만, 실은 축제라는 변명으로 전통을 유지하고 있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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