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들불축제(1)
도로가에 줄지어 휘날리던 제주들불축제의 현수막을 보고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축제인가 불지옥인가 싶을 정도로 커다랗게 타오르는 불에 초등학생 때부터 산불예방 포스터 그리기를 해 온 내 안의 시민의식이 꿈틀거렸고, '들'과 '불'이라는 붙어서는 안 될 것 같은 두 단어의 뜨거운 하나됨에 인지부조화가 왔다.
들불축제는 애월읍과 구좌읍을 오가며 개최되다 2000년부터 새별오름에서 운영되는 것으로 고정되었다. 이렇게 큰 불을 마음 편히 구경할 수 있는 기회가 흔치 않기에 사람들이 몰려들었고, 제주시는 더 많은 관광객을 불러 모으기 위해 정월 대보름에 진행되던 축제를 따뜻한 봄으로 미뤄 개최하기 시작했다.
제주의 대표 축제 중 하나인 들불축제가 시민들에게 주는 즐거움과 경제적인 효과가 크다고 판단해서인지 제주시에서는 들불축제에 꽤나 공을 들이는 모양이었다. 제주에서 가장 상징적인 곳 중 하나인 삼성혈(제주도의 고대왕국인 탐라국 건국 신화의 배경이 되는 곳이다.)에서 제를 지내고 불을 피우는 것으로 축제의 막이 올랐다.
불씨는 여러 개의 횃불로 옮겨 붙었고, 10명 남짓한 불도채비(불도깨비의 제주 사투리)의 손에 각각 들렸다. 불도채비 손에 들린 불씨는 시민들과 함께 삼성혈에서 걸어서 15분 거리에 있는 시청까지 이동할 예정이었다.
불씨를 든 불도채비들을 따라 삼성혈 밖으로 나오자 4열 종대로 자리한 경찰악대의 트롬본과 색소폰, 심벌즈와 드럼이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연주를 시작했고 제주 자치경찰의 현란한 호루라기 소리와 함께 얼떨결에 통제된 차도 위로 올라섰다. (이런 스케일의 행사였나!) 행렬의 맨 뒤에는 역시나 빠질 수 없는 풍물패가 자리했고, 그렇게 동서양의 연주단이 앞뒤로 호위하는 이 행렬에 어쩌다 끼어든 나는 알 수 없는 벅차오름을 느끼며 도로를 행진했다.
꽹과리 소리가 고막을 파고들어 심장까지 깨뜨리는 매력이 있다면 경찰악대의 화음은 눈썹 사이부터 척추까지 힘이 잔뜩 들어가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박자에 맞춰 다리를 쭉쭉 뻗으며 척척 걸어가야 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는데 눈앞의 불도채비들은 덩실덩실 춤을 추고 있어 역시나 동서양의 조화를 실감할 수 있었다.
주위를 둘러보니 불씨를 봉송하는 행렬 속 시민들은 다들 주황색 장갑에 LED 촛불을 들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이들은 미리 사전신청을 완료한 시민 봉송단이었고 이 사실을 눈치챈 순간부터 나는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사람처럼 겨드랑이에서 땀을 흘리기 시작했다. 장갑을 끼지 않은 맨손을 들킬까 봐 주머니에 손을 꼭 찔러 넣고, 미처 빠져나올 타이밍을 잡지 못한 채 엉거주춤 걸었다.
제주도도 서울 못지않게 퇴근시간에는 붐비는지라, 퇴근시간에 딱 맞춰 진행되는 성화 봉송이 아리송하기도 했지만 실은 시민들에게 축제를 홍보하기 위해 철저히 계획된 것이 아닐까 싶었다. 퇴근길 도로 한 면을 점거하고 트럼펫과 꽹과리 연주소리에 맞춰 덩실덩실 춤을 추는 일행은 정체된 차들과 길을 지나던 행인 모두의 시선을 잡아끌었던 것이다.
그러나 염려와 달리 누구 한 명 빵빵대거나 불평하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2층에 위치한 사람들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창밖을 내다봤고, 손을 흔들어주거나 함께 덩실덩실 어깨춤을 추는 사람들도 있었으며, 부모님들은 이 행렬을 배경으로 아이들의 사진을 찍었다.
이것이 제주시의 전폭적인 지지를 받으며 경찰악대의 호위를 받는 축제의 위엄이란 말인가. 사람들의 환호(?)를 받으며 '이 맛에 개선장군 했겠구나.' 하는 시답잖은 생각을 하다 마침내 목적지인 시청에 도착했다.
불씨는 시청 앞 광장에서 시장님께 무사히 잘 전해졌고, 시장님이 불씨를 안치시키는 퍼포먼스가 이어졌다. 불도채비가 시장님께 불을 전달하고 또 시장님이 큰 화로(달리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로 불을 옮기자 불이 크게 타오르며 폭죽이 터지고 팡파레가 울렸다. 퍼포먼스라기에는 너무나 짧은, 불을 여기에서 저기로, 또 저기에서 저어기로 옮기는 것뿐이었지만 지금까지 다른 곳에서 본 화려한 레이저나 개막 효과보다 인상 깊었다.
눈앞에서 힘껏 타오르는 불을 보고 있자니 문명인인 양 살아가고 있는 내 안에 선조들로부터 물려받은 DNA, 불을 둘러싸고 날고기가 아닌 조리된 고기를 먹으며 춤추고 환호했을 원시적인 DNA가 일렁이는 것 같았다.
불은 아주 오래전부터 인류 역사와 함께 해 왔고 불의 활용은 인류가 다른 종에 비해 월등히 발전할 수 있었던 이유 중 하나다. 불이 가진 생명력이 옮겨지는 것은 두려운 일이기도 했지만 인류의 생존과 번영에 꼭 필요한 경이로운 일이기도 했는데, 생명유지에 꼭 필요한 체온 유지를 돕고 날음식을 불로 조리해먹을 수 있게 되어 소화에 쓰는 에너지가 두뇌활동에 쓰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일만 팔천의 신, 화산섬, 동백꽃과 유채꽃, 돌하르방, 감귤 등 제주를 상징하는 것이 이렇게 많은데 왜 하필 들불축제가 제주의 대표 축제로 자리매김했을까 궁금했다. 나름대로 찾은 답이라면, 불에는 모두의 마음속에 잠들어있는 원시적인 두려움과 생명력을 일깨우는 무언가가 있었다. 축제의 의미는 우리의 심장을 울려 마음의 에너지를 열어놓게 하는 것에 있다. 뜨겁고, 강렬하고, 옮겨지고, 솟구치는 속성을 가진 불의 DNA는 모든 축제가 추구하고자 하는 역동성과 무척이나 닮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