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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엄 Dec 11. 2023

볼거리와 할거리

서귀포 문화재 야행(2)

축제 이튿날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전날 갔던 작은 무대에서는 초청 음악단이 트로트를 연주하고 있었는데, 어디선가 단체로 온 할머니 예닐곱 명이 얼마 안 되는 좌석 절반을 차지하고 즐기고 있었다.


초대 가수는 할머니들 중 그나마 반응이 가장 뜨거운 분들을 무대 위로 끌어올려 노래를 부르시게 했다. 무대는 자연스레 그들만의 노래방이 되는 중이었다.


90살은 되어 보이시는 할머니가 부르는 나훈아 노래는 반박자씩 느렸고 가사도 약간씩 달랐으나, 좌석에 앉은 할머니들 역시 박자 따위는 딱히 신경 쓰지 않는다는 듯 저마다 다른 속도로 박수를 쳤다.


한 심리학 박사가 말하길 여러 명이 박수를 치면 점점 같은 박자가 된다고 했다. 하지만 할머니들의 무대와 박수는 맞아갈 법한데도 전혀 맞지 않아 심리학자들이 평생에 걸쳐 한 연구를 정면으로 반박하고 있었다.


한 명씩 나와 애창곡을 부르던 할머니들은 유람선을 타러 갈 시간이 되었는지 노래를 부르다 말고 한꺼번에 우르르 빠져나갔고, 관객이 하나도 없는 무대에서 가수와 색소폰만 남은 노래를 열창했다.


애매하게 보여주고 싶은 게 많았던 축제는 결국 서로의 프로그램으로 인해 얼마 없는 사람들을 서로 뺏고 빼앗기는 중이었다.


하지만 주최 측에서 준비한 그 어떤 볼거리도 도파민에 찌든 나의 눈을 붙들어두지 못했고, 혼자 이리저리 방황하다 새연교를 넘어가 새섬에 갔다.






새섬의 새는 bird가 아니라, 지붕에 올리는 지푸라기의 재료가 되는 식물 '새'를 말한다(들불 축제에서 짚줄놓기를 할 때 쓰인 바로 그 짚이다).


예전부터 새가 많이 자라는 섬이라고 하여 새섬이라고 불렸는데, 제주섬과 새섬을 잇는 새연교가 준공되어 걸어서 건너갈 수 있게 되었다.


새섬에는 미션을 즐기면서 섬을 한 바퀴 도는 체험형 프로그램이 준비되어 있었다. 첫 미션은 ‘자청비(자청비는 제주의 일만 팔천 신 중 하나로, 오곡씨를 가지고 육지에 내려와 농경의 신으로도 불린다)’로 삼행시를 짓는 것이었다.


'자유로운 청정자연 비자림' 같은 뻔하고 재미없는 삼행시를 지어 낸 나는 다른 사람들의 쓴 삼행시를 보며 감탄했다.


특히 외국인 유학생들의 삼행시는 반전과 비애와 유머를 모두 담아낸 한 편의 작품과 같았다. 러시아에서 온 제주도민 올레샤는


자신감 있게

청춘을 보냅시다

비자걱정 없이ㅋㅋㅋ


라는 삼행시로 유머를 녹여내 감탄을 자아냈고, 한 베트남 사람은


자유로움을 찾기 위해

청정제주로 왔다

비용이 많이 든다.


라는 삼행시로 자유를 찾아 고향을 떠난 베트남 사람들의 디아스포라적 스토리와 제주의 높은 물가, 이로 인한 애환을 녹여내 심금을 울렸다.






산책로를 조금 더 걸어가서 참여한 다음 미션은 젓가락으로 현무암 돌멩이 옮기기로, 1분 안에 10개의 작은 현무암 돌멩이를 들어 통에 옮겨야 했다.


흙을 퍼 날라 제주도를 만들었다는 설문대할망 이야기에 기반해 내가 돌멩이를 옮길 때마다 오름이 솟는다는 스토리텔링도 곁들여졌다.


운영요원들은 돌을 하나 옮길 때마다 “아이고 새별오름 솟았네”, "이건 금오름!“하고 외쳤고, 유쾌한 분위기 속에 손을 파르르 떨며 돌을 모두 옮기자 직접 주문 제작했다는 현무암 자갈 모양의 작은 공깃돌을 주셨다.


작고 둥글둥글한 현무암 모양의 공깃돌을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리니 창조를 마친 설문대할망처럼 만족스러워졌다.



축제에 관한 글을 쓴다고 할 때, “우리나라 축제에는 볼거리가 없어”라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인터넷을 통해 집에 앉아서도 전 세계의 훌륭한 볼거리를 즐길 수 있는 시대에 사람들이 모두 만족할 볼거리는 애초에 없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할거리는 다르다. 작은 할거리로도 무한히 큰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삼행시가 방황하던 발걸음을 붙들고, 하릴없는 공깃돌 옮기기가 순식간에 나를 창조 과정 한가운데의 설문대 할망으로 만든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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