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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엄 Oct 06. 2023

네 축제 내 축제

서귀포 문화재 야행(1)




  올해 처음 방문하는 서귀포시의 축제, 서귀포 문화재 야행은 서귀포시에서 진행하는 대표 축제 중 하나다. 제주시에 비해 인구가 현저히 적은 서귀포시는 그만큼 축제도 적었기에 오래간만에 짐을 싸 무려 1시간이나 떨어진 거리에 있는(제주도민의 거리 관념은 육지에 사는 사람들과 매우 다르며, 이주해 온 지 채 1년이 되지 않은 나의 거리 관념에도 벌써 큰 영향을 미쳤다.) 서귀포시로 향했다.


  퍼레이드의 출발지인 천지연 폭포 야외 공연장에는 한복을 입은 퍼레이드팀이 이미 앞줄 좌석을 모두 채우고 있었다. 퍼레이드 행렬은 다양한 구성으로 이루어져 있었는데, 퓨전 한복을 입은 시니어 모델들과 갈옷을 입은 외국인들, 치파오를 입은 중국 공연팀, 김제 지평선 축제 홍보팀(?)이었다.


  이제 처음 합을 맞춰보는 듯한 다채로운 구성의 퍼레이드 행렬은 시작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본래 단위로 분열하기 시작했다. 풍물패는 경쾌한 꽹과리 소리와 함께 자연스레 빨라지는 발걸음을 주체하지 못했고, 그 뒤를 따르는 시니어 모델팀은 점차 빨라지는 발걸음에 애써 미소를 유지한 채 복화술로 “왜 이렇게 빨리 가요”와 “빨리 좀 따라가세요!”를 번갈아 외쳤다.


  뒤따른 외국인들은 서울에서 초청받아 내려온 해외 대사관 직원들이었는데, 느릿한 발걸음으로 주변 경치를 즐기느라 여념이 없었다. 마지막에는 “대한민국 최고의 농경 문화 축제 제25회 김제 지평선 축제“라는 문구가 인쇄된 현수막을 단단히 쥔 일행이 파이팅을 외치며 출발했다.


  3분의 2지점 쯤 왔을까, 풍물패를 중심으로 그들만의 작은 공연을 시작했는데 하나의 행렬(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던 사람들)이 풍물패와 풍물패가 아닌 팀으로 나뉘었다.



  풍물패에 속한 사자탈은 풍물 비트에 몸을 흔들고 벌떡 일어나 앞다리를 흔들었다. 사자가 벌떡 일어났다는 것은 사자탈 안쪽의 사람들이 서로 목마를 태우고 차력쇼를 벌이고 있다는 뜻. 곧이어 그들은 사자탈을 훌렁 벗어던진 채 반인 반수의 모습을 하고 원반을 던졌다가 받는 묘기를 보여주었다.


  나머지 일행(시니어 모델들과 외국인 대사, 치파오를 입은 중국 공연팀)은 도로 위에 그대로 멈춰 서서 저마다 박수를 치거나 어깨춤을 추는 식으로 사자탈의 노고에 화답했다.


  그때, 이도저도 아닌 한 그룹의 사람들이 눈에 들어왔다. 풍물패 공연에서 다섯 발자국쯤 떨어져서 얼마 없는 퍼레이드팀과 관광객을 향해 “대한민국 최고의 농경 문화 축제 제25회 김제 지평선 축제“라고 쓰인 현수막을 들고 본분을 다하고 있는 김제 지평선 축제 홍보팀이었다.


  김제 지평선 축제 홍보팀은 제주 들불축제와 순창 장류축제, 2023 국제 종자 박람회 등 축제와 박람회라고 이름 붙은 것이라면 가리지 않고 찾아가 ‘업무 협약’을 맺는 축제계 인싸 중의 인싸로, 제주 곳곳에서 홍보 캠페인을 벌이다 마침내 놀라운 침투력으로 퍼레이드 행렬에까지 참여하게 된 것이었다.


  그렇다고는 해도 아무도 그들의 등장을 설명해주지 않았기에 모두가 의아한 시선을 한 번쯤 줄 수밖에 없었고, 남의 축제를 바라보는 우리도, 남의 축제에 와 있는 그들도 서로 어색한 눈길을 주고받았다.




  퍼레이드가 끝난 후에는 어느덧 어둑해져 ‘신들의 세계로 떠나는 해상 유람선 투어‘에 참여할 시간이었다. 아무도 앉으려 하지 않는 작은 무대에서 꿋꿋이 공연을 이어가는 트로트가수의 노래를 반주 삼아 유람선에 탑승했다. 축제 프로그램 중 유일하게 예약이 꽉 찬 이 프로그램은 기존 유람선 해설과 크게 다르지 않아 실없고 조금은 가부장적인 유머를 구사하며 출발했다.


  유람선에는 퍼레이드 행렬에서 본 시니어 모델 몇 분이 타고 있었는데, 알고 보니 그들은 제주의 일만 팔천 신을 상징했고 유람선에서 해설을 하시는 분은 맞은편에 앉은 시니어모델 한 분에게 일만 팔천 신 중에서 어떤 역할을 맡았는지 친근하게 물었다가 '저승사자'라는 말을 듣고 기겁을 했다.


  해설이 잠시 멈춘 사이, 배 안을 돌아다니는 신들과 사진을 찍으라는 안내방송이 나왔다. 하지만 화려한 한복을 입은 그들이 유람선 안 노래방 기계 앞을 서성이고 새우깡을 사기 위해 줄 서 있는 모습을 본 후라 신들이 아니라 그저 여흥을 즐기고 싶은 어른들처럼 보였고 몇 차례 재촉하는 안내방송에도 모두 서로 구석에 앉아 낯을 가릴 뿐이었다.


  조용한 분위기를 타개하고자 했는지, 주최 측에서 곧 올해 처음 선보이는 다이버들의 해상 공연이 있을 예정이니 기대해 달라고 이야기했다. 곧이어 저 멀리 반짝이는 불빛이 보이기 시작했다. 드라마틱한 음악이 긴장감을 고조시키는 가운데 불빛들이 밤바다 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아니, 도는 것처럼 보였다. 안전상의 이유로 가까이 다가가지 못해 멀리서 지켜보는 다이버들의 공연은 그들의 노력이 무상할 정도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노래가 극적으로 치달아 갈수록 그 애잔한 움직임과 괴리감이 커져 관람객 사이에서 헛헛한 웃음이 터져 나왔다.


  "오늘 우리가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을 보는 거야!"


  아직 6월이라 차갑고 어두운 바닷속에서 몇 시간이고 대기했을 그들에게 미안한 마음마저 들어 비난하기보다 저마다 긍정회로를 돌리기 바빴고, 처음이자 마지막 공연을 보는 거라고 외친 누군가의 목소리에는 약간의 광기마저 실려 있었다.




  그러나 기대에 비해 내실이 없었던 축제에 대해 헛헛한 마음을 감출 수는 없었고 배에서 긍정회로를 소진해 버리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또 한 번 ‘김제 지평선 축제 홍보단’을 마주쳤다. 메인 무대 옆에 자리를 잡고 김제 쌀 500g과 팜플렛을 쥐어주면서 늦은 밤까지 홍보를 하고 있었다.


세상 중요한 일을 하고 있다고 믿게 만드는 그들의 열정에 긍정회로가 다시 돌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 축제는 누군가에게 굉장히 중요했을 것이고, 어쩌면 모두에게 그렇게 나쁜 경험은 아니었을지도 모른다고.


내 축제(김제 지평선 축제)에 열정적인 만큼 네 축제(서귀포 문화재 야행)에서도 최선을 다해 자리를 지키고 예의를 다하는 그들의 모습에서 축제인이라면 마땅히 가져야 할 축제맨쉽을 엿볼 수 있었다. 집으로 돌아가는 내 손과 마음을 채운 것은 쌀 500g과 내 축제 네 축제 가리지 않는 축제인의 마음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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