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어폰을 꽂고 산책을 하던 내 귀에 '철학과'라는 단어가 들리자 귀가 쫑긋 세워졌다. 고등학생인 아들이 철학과를 지망하는 듯했고 아버지가 그 생각을 저지하는 모양새였다. 나는 왠지 억울해 아들의 편을 들어주고자 가던 길을 돌아서기까지 했지만, 영문 모를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부자(父子)와 눈이 마주치자 할 말을 잃고 다시 돌아서 가던 길을 가고 말았다.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까지도 그때 한 마디도 못하고 돌아선 게 마음에 남는다. 언제부터 그렇게 철학과에 애정을 가지고 후배들을 챙겼다고. 그래도 당시 철학과에 재학 중이던 학생으로서 한 고등학생이 넓게 보면 후배나 다름없다고 우길 수 있는 장차 어느 학교의 철학과 학생이 되는 것을 지지해 주지 못한 것은 심히 가슴 아픈 일이었다.
그때의 일이 마음에 남아서였는지, 이후 모교에 교생실습을 갔을 때 아무도 시키지 않았지만 철학과에 관한 학과탐방 강의를 만들어 올렸다(당시에는 코로나19로 인해 모든 학생들이 온라인 학습을 하고 있었다) 그때 만든 강의 속 이야기에, 지금의 생각을 더해 철학이 삶에 어떤 식으로든 도움이 되고 밥 먹여줄 수 있다고 항변하고자 한다. 다소 개인적인 이야기다.
철학이 나의 삶에 도움을 준 세 가지를 수영에 비유하자면 다음과 같다.
1. 물의 흐름을 읽다
2. 깊이 잠수하다
3. 헤엄쳐 나아가다
1. 물의 흐름을 읽다
얼마 전 제주도에서 인생 첫 스쿠버 다이빙을 경험했다. 처음 보는 신기한 광경에 정신이 팔린 무렵 물속에서 순간 몸이 휘청일 정도의 강한 흐름을 느꼈다. 물속에도 물이 흐른다더니, 물의 흐름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신기하기도 하고 놀라기도 해서 심장이 콩닥였다.
물속에 흐름이 있듯 세상사에도 흐름이 있다. 철학과에서 1학년때 듣는 과목은 동양철학사와 서양철학사인데, 유명한 철학자들이 어떻게 자신의 철학을 정립했는가는 그가 살아간 시대 및 생애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기 때문이다. 철학사를 잘 배워 놓으면 어떤 맥락에서 철학자들의 독특한 생각이 탄생한 것인지 알 수 있고, 시대라는 큰 흐름 속에서 바라볼 때 비로소 그들의 철학을 깊이 이해하게 된다.
살다 보면 '맥락'을 읽어내는 게 참 중요하다는 것을 자주 느낀다. 일을 하며 때로 내 노력만큼 결과가 나오지 않을 때도 있었고, 노력에 비해 결과가 잘 나올 때도 있었다. 같은 일을 하더라도 내가 속해 있는 회사와 산업의 현 상태, 국가의 정치적인 상황과 전 세계의 코로나 상황처럼 거스를 수 없는 큰 흐름이 있기 때문이다.
왜 노력에 비해 결과는 반대로 흘러가는지 이해할 수 없을 때, 왜 뜬금없이 A라는 지표가 상승했는지 알 수 없을 때, 모든 일에 흐름이 있다는 것을 안다면 결과에 일희일비하기보다 그 이유와 데이터를 면밀히 분석하고 대책을 세울 수 있다. 철학 공부를 하며 철학자가 살아온 시대상과 그의 철학을 연결 짓는 연습을 해 왔다면 단순히 현상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럽게 그 현상이 일어나게 된 맥락까지 살피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