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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엄 Jan 16. 2023

하찮은 대화가 인생을 즐겁게 한다


"...곱빼기.."



응? 무슨 소리야?


"우래옥(을지로에 위치한 평양냉면집)에 가면 곱빼기로 시켜야겠어."


그의 말이 하찮게 느껴져서 잠이 달아나게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이 하찮은 자식.. 진지하게도 말하는구나.


무슨 음식이든 적당히 감사하고 맛있게 먹는 나와 달리 미식가인 남자친구는 웬만한 식당에서는 만족하는 일이 없다.


그는 미식가답게 평양냉면을 아주 좋아했고,  이는 굴소스에 향신료와 조미료를 버무린 베트남음식 스타일을 좋아하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맹맹한 음식을 앞에 두고 생각에 잠기는 일이 잦아진다는 것을 뜻했다. (미식가들이란..)


같이 유명한 평양냉면집을 몇 곳 다녀보았는데, 그중 우래옥만이 10점 만점 중 10점으로 그의 입맛을 사로잡았다. 내가 서울에 살 때에는 같이 종종 우래옥에 갔고, 무더운 여름날 에어컨이 나오지 않는 듯한 옆의 비좁은 카페에서 우직하게 몇 시간씩 기다렸다 먹고 오기도 했다.


카페 안 손님들이 모두 우래옥 대기자일 거라는 생각을 했던 건 착각일까. 우래옥은 대기자를 위한 우래옥 카페를 만들어 아메리카와 냉면 육수를 팔아주기를 이 자리를 빌려 외쳐본다. 물론 나는 아메리카노를 선택하겠지만.




같이 제주에 내려온 후에도 내가 일이 있어 서울에 가게 되면 그가 부러워하는 건 단 하나. 우래옥이다.


"좋겠다... 우래옥 먹고 올 수 있겠네?"


냉면 육수가 조금 흘러 뇌 속으로 들어간 걸까 진지하게 고민이 될 정도로 그는 이미 우래옥에 잠식당했다.


다가오는 설날, 아직 결혼을 하지 않았기에 친척들까지 모이는 자리에 서로 오가는 건 좀 이르고 대신 이어지는 설 연휴기간에 서로의 집에 한 번씩 들러 가족들과 인사를 하기로 했다.


자기 가족에게도 별로 관심이 없는 그에게 우리 가족의 안위는 중요한 관심사가 아니다.(아직까지 나에게는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준다는 사실에 감사할 따름이다)


일주일 전부터 그는 "서울 가면 우래옥 먹어야지!" 하는 취지의 이야기를 매번 다른 형태로 하기 시작했는데, 이게 사랑이 아니라면 뭘까 진지하게 고민되기 시작했다.


어젯밤에는 잠을 청하려다 말고 뜬금없이 '곱빼기를 시켜야겠다'라고 절절한 사랑고백을 했다. 웃음을 터뜨린 후 함께 우래옥 냉면을 제주로 공수해 올 방법을 진지하게 고민했다.


육수가 많아서 다 먹으면 항상 남으니까 처음 나오면 미리 보온병에 담아 놓는 거야. 면은 따로 삶으면 모은 육수로 우래옥 냉면 한 사발을 만들 수 있지 않을까? 아니면 점심에 먹고 하나를 더 포장에서 저녁에도 먹는 건?


대화의 끝에는 이런 고민을 진지하게 하고 있는 게 하찮은 것 같아 장난치듯 놀렸다. 함께 웃다가 잠시 대화가 사라지고, 가만히 틀어놓은 아이유의 음악을 듣던 내가 말했다.


"근데... 생각해 봤는데 아이유랑 이종석도 잘 어울리는 것 같아. 둘이 내면이 비슷한 느낌?"


네가 하는 말도 하찮잖아! 이번에는 남자친구가 웃으며 공격이다. 그렇게 하찮은 대화 배틀을 이어나가다 마침내 잠을 청하며 생각한다, '내 즐거움의 원천 중 하나는 이런 하찮은 대화들'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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