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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조이엄 Jan 17. 2023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

길을 잃었더라도 결국 끝까지 완주하게 하는


고등학생 때 처음 만난 친구 동글이(가명)는 말 그대로 '마이쮸를 건네며' 수줍게 친구 요청을 해왔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지만, 반에 아는 친구가 한 명도 없어서 초조하게 며칠을 지내며 관찰한 끝에 옆자리였던 나를 픽(pick)했다고 한다. 돌이켜보니 영광이라 친구가 있는 북쪽을 향해 아련한 눈빛을 보내본다. 북쪽에 계신 그분 아닙니다.


동그란 얼굴에 눈도 동그랗고 앞니까지 동그란 친구라 동글이라는 별명을 가졌는데 본인은 그 별명을 좋아하지 않았다. 동그랗고 맹해 보이는 인상과 달리 공부를 잘해서 놀랐던 기억이 있다. 공부할 때 쓰는 집중력은 뾰족하다고 생각했는데, '동글이 안에 저 뾰족한 집념이 들어있다니..!'한 느낌이랄까.


내가 본 동글이는 대략 이렇다


동글이는 예술적인 감수성이 뛰어나 또래 친구들이 듣지 않는 음악을 즐겨 들었는데, '짙은'이나 '9와 숫자들'의 노래를 그 친구를 통해 처음 들었다. 친구는 큐레이터나 예술 잡지 에디터 같은 종류의 일을 희망했지만 현실적인 이유로 경제학과에 진학했다. 국내에서 손꼽히는 좋은 대학이었다.


하지만 친구는 경제학을 싫어했다. 정확히 말하면, 수업 중 자신의 정치색을 분연히 드러내는 교수님들을 자신만의 언어로 조롱했고 부모도 내다 팔 것 같은 경제 논리와 그래프에 질색했다. 여전히 예술 일을 희망했지만 역시나 현실적인 이유로 대기업에 입사했다.




친구가 품은 뾰족함은 공부를 할 때뿐 아니라 일을 하면서도 꿈을 놓지 않게 해 주었다. 매일 야근을 하는 살인적인 일상 속에서도 예술 플랫폼의 에디터로 지원해서 꾸준히 전시와 영화, 연극을 보고 글을 써냈다. 올해도 새로운 예술 플랫폼의 에디터로 지원해서 멋진 글을 한 편 써 공유해 주었다.


겉모습과 달리 깊은 속내가 있어서 글을 읽다 보면 더 사랑하게 될 수밖에 없는 친구를 나는 언제나 궁금해했다. 그 속에는 어떤 생각이 들어 있는지, 몇 번의 이직을 하면서도 예술을 붙잡고 야근을 하면서도 주말마다 전시장에 가고 글을 쓰는 힘이 어디서 나오는 것인지.


얼마 전 공유해 준 글의 자기소개에서, 친구는 자신을 이렇게 소개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
삶을 깨트리는 예술을 사랑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랬다. 원하는 과가 아닌 다른 과에 갔음에도, 현실적인 이유로 엉뚱한 곳에 취업을 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으로 계속해서 나아가고 있었나 보다. 삶이 주는 굴곡을 오르내리고 때로 엉뚱한 개울을 건너면서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 끝에 닿겠다'고 읊조렸겠지.


친구가 쓴 글을 읽고 이 한 줄 자기소개를 읽으며 그동안 나는 너무 양보하고 살았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다른 사람이 원하는 방향으로 끌려가 주고, 한정된 재화를 너무 많이 갖는 것을 경계하면서, 내 마음이 바라는 일보다 내 옆의 소중한 사람들이 하는 말에 더 귀 기울이면서.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이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마음으로 살아야겠다. 내가 하고 싶은 일에 더 높은 우선순위를 두면서. 어쩔 수 없는 상황이 앞길을 막고, 엉뚱한 개똥밭을 구르게 되더라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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