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천히 서두르라
대니 보일 감독의 영화 ‘슬럼독 밀리어네어 (Slumdog Millionaire)’에는 학력도 경력도 볼품없는 빈민가 출신 주인공 자말이 등장한다. 퀴즈쇼에 출연한 그는, 무서운 기세로 문제를 맞히기 시작하더니, 결국 사람들의 의심을 뒤로하고 우승을 거머쥐며 백만장자가 된다.
그가 그렇게 어려운 문제들을 맞힐 수 있었던 이유는, 지내왔던 세월이 운명처럼 퀴즈쇼의 문제들과 모두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어려운 퀴즈 문제를 거침없이 풀어나가는 그의 모습과, 가난했던 그의 질곡의 삶이 겹쳐진다. 마치 그는 퀴즈쇼에서 우승하기 위해 지난날을 버텨온 것 같다.
때때로 미래의 관점에서 현재를 바라보려 노력하는 것도, 고달픈 현재의 삶에 매력을 부여할 수 있다. 현재의 고통과 아픔이 퀴즈쇼 우승자가 되기 위한 복선일 뿐이라는 기분 좋은 상상 말이다. 반대로 그런 상상만으로 단 한 번뿐인 인생의 순간순간을 모두 참아내는 것이 현명한지에 대해서는 누구도 자신 있는 답변을 내놓기 어렵다.
삶은 유한하다. 시간이 제한되어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그 시간이 각자에게 얼마큼 주어진지는 아무도 모른다. 내일을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는 사이, 유한한 시간은 도도히 흐를 뿐이다. 그것을 거스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고대 헬라인들은 시간과 관련해 단선적인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크로노스(Χρόνος)’, 시간의 깊이를 나타내는 ‘카이로스(καιρός)’라는 두 개념을 사용했다. 즉, 아침이 오고 낮과 밤이 지나면 다시 아침이 오듯이, 생물학적이고 자연스러운 시간의 흐름을 나타내는 것이 크로노스, 양으로 환원할 수 없는 지금 이 순간(nunc stans: 영원히 정지된 현재)의 즐거움, 끝을 향해 흘러가는 시간의 개념 속에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현재 그 자체의 의미가 바로 카이로스다.
결국에는 멈추고 마는 크로노스의 단선적 시간을 앞에 두고 살아가는 우리는, 유한한 시간 내에 무엇인가를 이루기 위해 서둘러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카이로스의 관점에서 다시 돌아오지 않는 바로 이 순간을 깊이 있게 음미하지 않으면, 인생은 그렇게 덧없이 달리다 끝나는 것이 된다.
그러니 (우리가 산업화 시대의 논리로 사용했던) 내일을 위해 오늘을 희생한다는 명제는 카이로스의 시간 개념을 전혀 고려하지 않은 삶의 태도가 된다. 반대로 현재를 즐기는 깊이에 매몰된 나머지, 자신의 게으름에 관대한 사람에게는 준비된 미래는 없다. 결국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를 자신의 상황에 맞게 최적으로 혼합한 의미 있는 오늘이, 의미 있는 내일, 그리고 종국에는 언젠가 끝이 날 고유의 삶을 만든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는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정반합의 개념이다.
크로노스의 시간만 따라 서두르는 와중 주위를 둘러본 적이 언제였던가. 혹시 카이로스적 시간에만 매몰되어 깊이와 의미만 찾다가, 앞으로 움직이는 것조차 두려워하고 있지는 않았던가.
‘Festina Lente.’ 로마의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남긴 이 경구는 ‘천천히 서두르라’는 뜻이다. 크로노스와 카이로스 시간의 개념을 모두 포함한 모순어법(oxymoron)을 사용해, 로마시대 지도자가 갖춰야 할 신중함을 권고하기 위해서 쓰였다. 각기 다른 우리의 현재의 상황이 어떻든 간에, 충분히 음미해 볼 가치가 있는 문구다.
<참고문헌>
"Festina Lente: 부지런히, 그렇지만 느긋하게!" (김혜미, 새가정 55권 598호, 2008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