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하는 일상에 대하여
극작가 버나드 쇼의 묘비에는 이런 문구가 적혀있다.
“우물쭈물하다 나 이렇게 될 줄 알았지.”
작가로서의 위트가 드러나는 명문이지만, 인간의 한계와 피할 수 없는 슬픈 운명을 축약해 보여주는 것 같아 씁쓸한 기분마저 든다.
수도 없이 계획을 세웠다. 그러나 계획은 변경하라고 세우는 것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실행은 그렇게 어렵다. (우물쭈물하지 않고 그 계획들의 반의 반만 이행하거나, 아니 시작만했더라도 오늘이 많이 달라졌을텐데 말이다.)
그러니까, 2006년 봄. 10년도 넘은 기억이다. 사고(思考)의 벽에 갇혀있었던 필자는, 가족의 권유로 우연한 기회에 한 교회에 들렀다. 인류 최고의 베스트셀러라 불리는 성경의 역사와 함의에 대해서는 깊이 알지 못하면서도, 한국 교회의 허울에 대한 무조건 적인 비판에 동조하며, 종교적인 메시지와 현실적 한계를 구분하지 못하는 비판을 위한 비판을 하던 20대의 청년이었다. 그런데 그 날 우연한 설교를 듣다가, 정신적으로 허물어지고 말았다. 종교적인 부분은 차치하더라도, 인간이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지, 불완전한 존재인지에 대한 갑작스러운 깨달음이 왔기 때문이었다. 그날 설교와 함께 들었던 프랑스 사상가 폴 발레리의 명문은 아직도 잊히지 않는다.
"그대가 (용기를 내어) 생각하는 대로 살지 않으면, 장차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될 것이다."
남들이 맞다고 하는 말이 다 맞는 줄 알았다.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선동하는 대로, 다수가 소리치는 대로, 내가 속해있는 집단의 논리대로 생각하는 것 이외에는 스스로 생각하는 훈련을 해 본 적이 별로 없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에야 비로소 이렇게 우물쭈물하다가 그냥 사는 대로 생각하게 되겠구나라는 두려움이 엄습했다.
흔히 한국인의 성격을 나타내는 표현으로 ‘냄비근성’이라는 말을 쓰곤 한다. 냄비의 된장찌개가 펄펄 끓을 때는 모든 재료와 양념이 어우러져서 진한 국물 맛을 내지만, 한 번 식으면 그저 그런 음식으로 전락한다. 다수가 끓고 있을 때는 개인에 대해 잘 인식하지 못한다. 그러나, 찌개가 식고 나면 찌개의 하나의 재료였던 나는 온데간데없다. 상황에 따라 다수가 끓을 때도, 내면의 목소리가 동의하지 않는다면 '용감하게' 모른 척할 필요도 있다.
집단 논리에 아무 생각 없이 몸을 맞추는 것이, 그래서 그저 사는 대로 생각하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에 대해 깨달은 것도 바로 그때였다. 만들어진 길은 우리에게 많은 편리함을 가져다 주지만, 동시에 우리 자아에 대해서 고민할 기회는 충분하게 주지 않는다. 우리가 앞길을 먼저 걸어간 부모, 선배, 상사의 업적을 찬양하며 안정(?)을 택하는 사이, 사실 스스로 생각하는 법을 잊어버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철학자 강신주는 이렇게 말했다.
“스스로 꿈을 꾸지 못하고 타인의 꿈을 나의 꿈으로 받아들이는 순간, 우리는 주인이 아니라 누군가의 노예로 전락하게 된다. 허영 때문일 까. 스스로 주인이라는 사실을 감당하지 못했기에 누군가의 노예로 전락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애써 숨기려고 한다.”
작금의 최순실 국정농단 사태를 통해, 검찰을 들락날락하는 공무원들을 보며 많은 사람들이 다시 아이히만을 떠올리고 있다. 한나 아렌트는 <예루살렘의 아히히만: 악의 평범성에 대한 보고서>를 통해 조직 논리만을 따라 나치의 홀로코스트에 참여한 독일 장교의 궤적을 복기하며 ‘악의 평범성’에 대해 논했다. 아이히만에게는 나치의 행위가 옳고 그른지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조직의, 상사의 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것이 전부였다.
아이히만은 재판정에서 줄곧 자신은 오로지 행정적 업무를 수행한 것이고, 법과 명령을 준수한 공무원에 불과하다며, 자신이 집행한 유대인 학살에 대해 책임이 없다고 주장했다. 정신과 전문가들도 그는 ‘정상’이라는 소견을 내었다. 게다가 그는 몰락한 중산계급 출신으로 거대한 관료조직의 톱니바퀴 같은 평범한 사람이었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한나 아렌트의 고도의 심리 분석이다. 아렌트에 따르면 그의 죄는 ‘무사유(thoughtlessness)’에 있었다. 설사 그가 명령을 준수한 평범한 조직의 일반 직원일 지라도, 말 그대로 그의 행위가 미칠 영향에 대해 아무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자신의 이해에 관한 한 ‘영악한’ 사람이라는 결론이었다.
조직의 권위에 기반한 명령이나 다수의 논리가 무조건 진리인 줄 알며 살다가는, 옳고 그른 것도, 자신에게 유익이 되는 것, 해가 되는 것을 구분할 능력을 잃게 되고 만다. 자칫하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될 수 있다는 것을 이렇게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그리고 2017년 2월 대한민국의 오늘을 사는 우리는 이를 뼈저리게 보고 듣고 느끼고 있다.
사회인으로서의 우리 모두는 끓고 있는 된장찌개가 영원히 식지 않을 거라는 환상 속에 빠져있다가, 그 환상이 깰 때쯤 버나드 쇼의 문구를 중얼거리게 될지 모르는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생각하는 대로 살려면 적어도 어느 정도의 (때로는 심각하게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언제나 결정은 자신의 몫이다.
참고기사
1. [물음을 찾아 떠나는 고전 여행] 예루살렘의 아이히만 왜 평범한 사람이 악(惡)을 서슴지 않을까?- 박종선 (주간조선 2441호 2017년 1월 16일)
2. 아이히만과 박 대통령의 사람들 - 서재경 (허핑턴포스트 2016년 12월 30일)
3. [아침을 열며] 일상의 아이히만 - 김희연 (경향신문 2017년 1월 9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