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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혹의 우뇌 Jan 14. 2017

<선원 빌리 버드>의 충고

2017년 대선 - 회색 현실을 살아가는 태도에 대하여

지난 2012년 8월 울. 여의도 한복판에서 대낮 칼부림 사건이 벌어졌다. 카드 빚과 생활고에 시달리던 한 30대 실직자가 동료들을 해하려 한 것이었다. 그는 1년 동안 모 신용정보회사에서 근무했었는데, 동료와의 원만하지 못한 관계와 실적 부진으로 퇴사했다. 그는 경찰 조사에서 “혼자 죽으려니 억울”했다며 자신을 “험담하던 직원을 죽이기로 결심했다”라고 말했다. 선혈이 낭자한 여의도 한 복판에는 실직자의 옛 동료들이 피를 흘리며 누워있었다. 말 그대로 피비린내 나는 경쟁사회, 어떻게 글자 그대로 이리될 수 있는가. 


언젠가인가 동료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경쟁자를 밟을 때는 확실히 밟아줘야 해. 죽기 살기로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나중에 내가 위험해.”소위 지하세계(?)나 무정부 상태에서나 쓰일법한 무시무시한 이야기다. 사실 그 동료의 표현은 영미식 자본주의가 깊숙이 자리 잡은 우리 사회에서 유효하다. 그 틀에서는 이기고 지는 결과만 있을 뿐, 중간은 없다. 


경쟁 사회는 냉혹하다. 우리는 다툰다. 그러나 다툴지언정 자신 혹은 상대가 완벽하게 옳을 수는 없다. 칼을 휘두른 그는 구속이 되었을 테고, 피해자들은 심하게 다쳤다. 회사에서 극도록 악화된 그들 관계의 원론적 잘못이 누구에게 있는지 제삼자는 알 수 없다. 그러나 확실한 건 결과론 적으로 모두 피해를 입었다는 것이다.


허만 멜빌의 소설, <선원 빌리버드>


허만 멜빌의 소설 <선원 빌리 버드>에서는 순수하고 정의로운, ‘절대 선’을 상징하는 선원 빌리 버드(Billy Budd)와 ‘절대 악’을 상징하는 존 클라가트 (John Claggard) 하사관, 그리고 선이 추구하는 고귀한 이상과 악이 만들어낸 비정한 현실을 조화시키는 비어 선장(Captain Vere)이 등장한다. 항해 중 절대 악을 상징하는 존 클라가트는 절대 선을 상징하는 선원 빌리 버드를 시기하고 모함한다. 그러다 우연한 사건으로 빌리 버드가 우발적으로 존 클라가트 하사관을 죽이게 된다. 결국 절대 선이 절대 악을 무찌르게 된 것이다. 그러나, 배의 규칙상 절대 선을 상징하는 빌리 버드는 살인을 저지른 것이다. 


절대 선으로 불리던 빌리 버드의 (의도가 없었고, 우발적이었던) 살인에 대해 현실적 결정을 내리게 될 위치에 있었던 비어 선장은 고뇌한다. 그리고 이렇게 결론을 내린다.


"우리는 반란 법에 의거하여 재판을 하고 있소. 자식이 아비를 빼닮을 수밖에 없는 이치와 마찬가지로 반란 법은 그 정신적 모체인 전쟁을 빼닮았소.... 전쟁은 정면만을, 다시 말하자면 외형만을 주목한다네. 그리고 반란 법도 전쟁의 자식으로서 아비를 본받아 외형만 바라본다네. 버드에게 범죄 의사가 있었느냐 없었느냐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네.(21장)"


빌리 버드는 결국 사형에 처해진다. 소설의 결과론적 상징성은 다음과 같다.


"절대 선의 현실적 적용은 정치적인 영역에서는 악행을 야기할 수 있다."


절대 선이라는 것은 종교의 영역에서는 존재할지언정, 결국 현실의 무대는 회색지대라는 것이다. 아무리 절대 선이 절대 악을 무찌른다 하더라도, 현실의 기준, 법의 기준에서는 죄가 될 수 있다. 


소설은 영화, 드라마로 각색되고, 오페라로도 공연되고 있다(사진 출처: Erhard Rom)


2017년 대선을 앞두고, 우리 사회는 다시 분열 양상이다. 논리적인 척 하지만, 감정적인 선동으로 구성된 별로 논리적이지 않은 자료를 통해 서로에 대한 비방들이 벌써 시작됐다. 정책을 위한 건설적 경쟁이 아니라, 스스로 옳고 상대는 그르다는 식의 비열한 야수성과 신패권주의의 조짐이 시작부터 가득하다. (물론 정치라는 것이 "대의""야수성"이 결합되어 이루어지는 것임을 부정할 수는 없겠지만 말이다.)


단 한 가지 걱정은 "절대 선 대 절대 악" 프레임으로 흘러가는 우리 정치의 단순성이다. <선원 빌리 버드>는 현실은 절대 선이 현실적 악행을 낳을 수 있고, 절대 악이 피해자가 될 수 있는 회색 지대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회색의 현실에서는, 이해와 타협의 성숙한 중간지대를 만드는 것이, 상대를 절대 악으로 규정해 극단으로 치닫는 것 보다는 더 현명한 일이다. 



<참고 문헌>

1. 여의도 칼부림, "이용만 당하고 회사 쫓겨났다." (한겨레 2012년 8월 22일)

2. '법률 문학의 대가' 허먼 멜빌 (안경환, 허핑턴포스트, 2015년 4월 13일)

3. 어떻게 살 것인가 (유시민, 생각의 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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