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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혹의 우뇌 Jan 14. 2017

성급하게 뜨는 샛별들

쉼 없이 달려감

5호선 공덕역 오전 7시 30분. 출근길 서울 지하철의 번잡함은 어김없다. 30센티미터도 채 안 되는 거리를 두고 살갗을 마주대고 서서, 각자의 일터로 향하는 사람들. 지난밤의 고된 일들도 다 어제 일일 뿐이다. 새벽 별이 뜨면, 다시 뛸 준비를 해야 한다. 그리고 다시 또, 달려야 한다.


삶은 달리는 것이 아닙니다.

달려가서 만나는 것은 죽음입니다.
빨리 달릴수록 죽음을 빨리 만날 뿐입니다.
삶의 목적은 성공도 아닙니다.
성공하고 나면 성공하기 위해 생략한 것이

더 소중 하다는 것을 압니다.
삶은 그냥 존재입니다.
건강하게 살아서 유지하는 것입니다.
나무는 살아있는 자체가 성장입니다.
사람도 그와 같습니다.

-     박해조


우리는 너무 바쁘다. 중고등학교를 마치고, 대학 진학, 취업까지, 쉼 없이 달려왔다. 학생 때는 대학만 가면 마음대로 할 수 있다는 달콤한 말에 속고, 대학 때는 취직해서 안정하면 한 시름 놓을 거라는 주위의 말에 다시 속았다. 평생직장의 시대도 끝났다. 그러니 우리에게 끝날 것 같던 길은 끝나지 않았다. 가정을 이루고 자녀를 양육하며, 사실 날이 갈수록 삶은 험난해진다.


마치 산타클로스가 크리스마스트리 밑에 선물을 놓고 간다는 비밀의 진실을 아이에게 말해주기 싫듯이, 우리는 이 사실을 공공연히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그 험난함을 오롯이 인정하는 순간 사랑스러운 오늘이 고통이 될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숨을 고를 시간은 과연 언제 찾아올 것 인가?


그것은 오로지 개인에게 달려있다. 사실 쉼 없이 달려가는 것은 인간의 숙명이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산다는 것처럼 허무한 삶도 없기 때문이다. 학교를 다닐 때에야 방학이 즐거운 법이고, 일을 해야 휴가가 달콤하다. 어둠이 있어야 빛을 고맙게 느끼는 것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쉼 없이 달려간다는 것 자체를 문제 삼을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렇다면 문제는 ‘어떻게’ 쉼 없이 달릴 것인가에 대한 문제다. 쉼 없이 달리면서도 어떻게 호흡을 고르고 휴식을 취할 것이냐는 것이다. 얼마나 달리는 그 자체를 (적어도 나에게만이라도) 즐겁고 편하게 만들 것이냐는 문제다.



20대의 방황, 군입대 등으로 더디게 보낸 7년간의 대학 생활을 마치고 사회의 문턱을 두드렸다. 미래에 대한 불투명한 이상과 기대, 그리고 현실과의 괴리감에 버거운 날들이 많았다. 돌이켜보면 불확실성 앞에 스스로 자신감 있는 선택을 하며 살아오지는 못했다. 좋아하는 일을 과감히 선택할 용기도 없었고, 노력도 부족했다. 불확실성을 두려워하느라, 확실한 차악을 좇는 어리석음도 범했다.


"사람들은 불확실성으로 인해 고통받느니, 확실한 고통을 택해버린다." - 버지니아 사티어


사회구조에 대한 저항정신과 주류사회로의 편입에 대한 갈등 사이에서, ‘고독한 비겁자’ 정도 되었던 것 같다. 주류사회에 올라타야 한다는 중압감과 그래도 뭔가 멋있고 폼나는 젊음의 희망을 대변하는 직업이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 사이에서 줄다리기를 하며 지내왔다. 그러나 40대를 한 해 남겨 둔 지금 냉정히 자신을 돌아보면, 젊음을 불꽃처럼 달리려 했으나 마음은 그렇게 불꽃처럼 아름답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남는다.


그러나 앞으로의 삶을 계획하는 데 필요한 귀중한 단서도 얻었다. 그것은 어떤 선택을 할 때든, 반드시 내면의 목소리를 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외적인 충족보다는 내적인 충족이 우선되어야 어떤  일이든 지속가능하고, 내면의 평화를 파괴하는 수준의 욕망은 꿈꿔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지금도 아쉬운 것은, ‘어떤 직종이 유망하다’,‘어떤 곳이 돈을 많이 준다’라는 기술적 조언들에 현혹되지 않고, 한 인간으로서 ‘네가 진정으로 원하는 이상향은 어디에 있느냐’, ‘그것과 가장 근접한 직종, 혹은 꼭 경험은 해봐야 하는 직종은 어떤 것이냐’, '꼭 만나야 하는 사람은 누군가" 등의 본질적인 물음에 대해 충분히 숙고할 만한 시간과 멘토가 없이, 앞만 보며 홀로 달려왔다는 점이다. 그러나, 나의 현재는 지나간 모든 작은 결정의 합이며, 그러므로 나의 현재는 내가 만든 것이다.


눈발이 날리던 날 첫 직장을 그만두며, 공허한 마음에 죽마 고우에게 전화를 했던 기억이 있다. 첫 직장에서 5년 이상을 버텼던 그 친구는 그때 나를 많이 걱정했다. (물론 본인이 이제 불확실성과 싸우는 예술가의 삶을 살고 있지만 말이다.)  


40 마이너스 1. 어색한 숫자다. 이제 하프타임이다. 전반전엔 좀 성급했고, 주위를 신경 쓰느라 어리석게도 정작 삶의 주인인 나를 깊게 들여다보지 못했다. 앞만 보고 달려도 시간이 모자랄 것 같은 전문성 향상과 커리어 개발에 대한 야망, 그리고 동시에 찾아드는 한 작은 개인으로서의 아쉬움과 미련들, 그 사이에서 아직도 끊임없는 줄다리기를 하고 있다.


정답은 없다. 선택은 항상 개인의 몫이고, 그 결과는 삶의 무게만큼 엄중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 샛별은 또 뜰 것이다.


쉼 없이 달려감

그대 두려움에 감싸여 있는 영혼이여

그대는 늘 이렇게 묻는다

험난한 날을 그렇게 많이 보냈건만

평화와 휴식은 도대체 언제 오는가?

오, 나는 안다

편안한 날을 맞이하자마자 우리는

새로운 것에 대한 그리움으로

사랑스러운 나날을 고통으로 보낸다는 것을

그대는 잠시 안식을 취할 뿐

다시 새로운 고통을 찾아 나간다

성급하게 뜨는 샛별처럼

우주는 조바심에 가득 차 있다


-      <힘든 시절에 벗에게 보내는 편지 - 삶을 견뎌내기> 중

헤르만 헤세, 유혜자 옮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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