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일 작가 파트리크 쥐스킨트의 단편 '깊이에의 강요'는 예술과 현실의 모순적 관계를 예리하게 간파한 소설이다. 소묘를 잘 그리는 한 유망한 젊은 여성 예술가는 전시회에서 어느 평론가에게 이런 비평을 듣는다. "당신의 작품은 재능이 있고 마음에 와 닿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깊이가 아직 부족합니다." 평론가는 단지 그녀를 북돋아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대중은 그 평론가의 비평을 되새김질하듯, '깊이가 없다'는 점에 대해 떠들어댔다. 힘들어하던 그녀는 자신에게 없다는 그 '깊이'를 찾으려고 고뇌하다 결국 139m 방송탑 위에서 몸을 던지고 만다. 도대체 그녀가 찾던 '깊이'의 실체는 뭘까?
예술의 본질은 주관적이다. 감정적이고 즉흥적이다. 재즈는 좋지만 클래식은 별로인 사람이 있는 것처럼, 그림도 보는 사람마다 느끼는 바가 다르고, 호불호(好不好)도 갈린다. 사실 예술 비평은, 주관적인 감성에 의해 만들어진 작품에 대해, 평론가 역시 주관적인 감정을 들이댄 것일 뿐이다. 하지만 평론가의 주관적 견해가 대중을 통해 객관적인 것처럼 확대 해석될 때 문제는 심각해진다. 그것이 대중문화의 함정이다.
물론 평론의 존재가치 자체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 어떤 예술 작품도 그것을 역사적·문화적으로 다듬어주는 사람이 없다면 세상과 소통이 어려울 것이다. 다만 '생산적인 비평'과 '주관적 견해의 배설'은 다르다. 소설 내용처럼 악의는 없었지만, 깊은 고민 없이 나온 평론이 때로는 한 예술가를 극단상황으로 몰고 갈 수 있다.
바야흐로 오디션 프로그램 전성시대다. 아마추어는 물론, 기존 프로페셔널들까지 분야를 넘어 새로운 도전에 동참하고 있다. 이들의 퍼포먼스에는 갖가지 평가들이 난무하며 인터넷을 달군다. 숨겨진 원석을 찾아 아름답게 다듬거나, 좀 더 탁월한 공연을 위한 비평들은 그 자체로 의미가 있다. 그러나 가끔 "○○씨의 노래는 그 무언가가 없어요"와 같은 지극히 주관적이고 감정적인 평가를 접할 때마다 씁쓸해진다. 그 '깊이에의 강요'가 앞날이 창창한 이들을 헤어나지 못할 늪에 빠뜨릴 수도 있다는 걱정 때문이다. '주관'의 영역인 예술에 대한 비평은, 그것이 최대한 객관적이고 구체적일 때 생산적일 수 있다. 경험을 통해 대중문화의 명암을 잘 알고 있는 '전문가'들의 좀 더 세심한 배려를 기대한다.
본 글은 2011년 5월 9일 조선일보에 기고한 글이다. 원문 출처는 다음과 같다.
[편집자에게] "노래에 깊이가 없네요"라는 평가의 가혹함 (조선일보)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