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노는 만큼 성공한다> 등 다수의 베스트셀러를 집필한 문화심리학자 김정운 교수는 사회적 지위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하는 일은 바보 같은 짓이라고 했다. 사회적 지위는 반드시 변하고, 사라지기 때문이다. 사회적 지위를 목표로 지내면, 우리가 아무리 그 자리를 지키려고 아등바등하게 살아도, 그 지위가 사라지는 바로 그 순간 우리 존재도 사라진다.
산업화 시대, 많은 선배들은 청춘을 훗날의 사회적 지위를 만들기 위해 보냈다. 물론 지금도 그러한 노력과 분투의 시간이 필요하다는 데는 이견이 없다. 문제는 그 삶이 자신의 몸에 맞느냐는 것이다. 그 끝을 생각하지 못한 채 오르기만 하다가는 어느 순간 그 지위와 멀어지는 날, 개인의 삶은 한 없는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있다.
인생은 옥시모론(Oxymoron)*이다. 모순투성이다. 오르기 위해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하면서도, 끊임없이 멈춰서 돌아봐야 한다. 지위란 것은 한정되어있는 것이고, 반드시 우리가 얻는다는 보장도 없다. 가수 루시드 폴의 ‘평범한 사람’이란 곡의 가사 내용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인간적인 한계에 대해 담담한 어조로 이야기하고 있다.
“오르고 또 올라가면/ 모두들 얘기하는 것처럼/ 정말 행복한 세상이/
있을 거라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나는 갈 곳이 없었네/그래서 오르고 또 올랐네/
어둠을 죽이던 불빛/ 자꾸만 나를 오르게 했네/알다시피 나는 참 평범한 사람/
조금만 더 살고 싶어 올라갔던 길/ 이제 나의 이름은 사라지지만/
난 어차피 너무나 평범한 사람이었으니……”
- <평범한 사람> (Youtube), 루시드 폴
오르고 또 올라도 사실 그 정상에 개인은 없다. 비밀은 시지프의 신화처럼 다시 내려가서 오르는 일을 반복해야 할 뿐이다. 정상에는 회전율이 심한, 사회가 만들어 놓은 어떤 자리만 있을 뿐이다. 자리는 중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내가 그 자리에서 무엇을 하느냐이다. 세월이 지나면 조직이 나사회가 만들어 놓은 자리는, 더 이상 나를 원하지 않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한 때 유엔에 근무했던, 사회혁신기업 MYSC의 김정태 대표는 본인의 저서 <스토리가 스펙을 이긴다>에서 이렇게 말했다.
“한때 '조직'의 위상이 내 것인 것 마냥 살아가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조직을 벗어나 자연인이 되었을 때도 과연 경쟁력이 있을 까. 장관 등 높은 분들을 옆에서 지켜봤다. 재직 시에는 사람들이 엄청 몰리지만...... 유엔의 한 기구의 사무총장을 했던 분도, 장관을 역임했던 분들도 혼자 쓸쓸히 식사하는 것을 목격하면서, 한때 내게 주어진 것을 영원히 내 것 마냥 오해하지 말아야겠다는 결심을 한 적이 있다."
사회적 지위는 불꽃과 같다. 불꽃놀이는 찰나의 미학을 보여주는 가장 완벽한 사례다. 불꽃이 터지는 그 순간, 우리의 시신경이 다채로운 색깔을 인지하는 그 몇 초가 지나면 이내 허공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내 존재는 사회적인 지위로 결정되는 것일까, 아니면 지극히 개인적인 관심사로 규정이 되어야 하는 것 인가, 우리는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사회에서의 "평범한 사람"을 거부하고, 개인 마음을 자주 들여다 보는 데 너무 인색했는지 모른다.
내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할 수 있을지, 어떤 순간에 희열을 느끼는지에 대해 알아가고, 적용해 나가는 것이 인생이다. 개인적 관심사가 즐거움이 되고, 그 즐거움이 평생의 업이 되는 화학작용이 일어나는 순간, 이들은 '어떤 자리'를 과감히 놓을 수 있는지도 모른다. 이 경지에 이르기까지 분명 비싼 인생 수업료를 내야 한다. 중요한 건 그 ‘에피 퍼니(epiphany)’의 순간을 위해, 끊임없이 더듬이를 뻗쳐 자신을 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제는 고인이 된 철학하던 록커 크롬 신해철의 노랫말이 계속 귓가를 맴돈다.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니가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그 나이를 처먹도록 그것 하나 몰라, 그 나이를 처먹도록 그것 하나 그것 하나 몰라. 이 것 아니면 죽음 정말 이 것 아니면 끝장 진짜 네 전부를 걸어보고 싶은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 ‘니가 진짜로 원하는 게 뭐야’ (Youtube), Crom’s Techno Works 중
옥시모론 (oxymoron): 영국의 대문호 제임스 조이스 (James Joyce)는 그의 소설 더블린 사람들(Dubliners)에서 아래와 같은 표현을 썼다."나의 감정이 어떤 즐거우면서도 악덕한(pleasant and vicious) 곳으로 빠져드는 것 같았다(I felt my soul receding into some pleasant and vicious region).” 즐거우면서도 악덕한 곳, 그 무슨 말도 안 되는 소리란 말인 가. 즐거우면 즐겁고, 악덕하면 악덕한 것이지 두 감정이 어떻게 공존할 수 있는 것이란 말인가? 옥시모론(oxymoron). 즉, 모순을 나타내는 이 표현은 사실은 가만히 우리 인생을 생각해 보면 맞는 표현이다. 때때로 즐겁지만 슬프고, 행복하지만 우울한 복잡 미묘한 감정을 단 한 번이라도 느껴본 적이 없는가. 열정을 바친 작업이 환호와 함께 성공적으로 끝났지만, 그 이후에 찾아오는 허무함을 느껴 본 적이 있는가. 아름다운 연주가 끝난 무대 뒤의 적막. 세상의 모든 것을 성공과 실패로 나누는 세속의 삶 가운데서, 지속적으로 겪는 정신적인 고독의 체험은 제임스 조이스의 문학적 표현에 찬사를 건넬 수밖에 없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