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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불혹의 우뇌 May 13. 2017

'라운드어바웃'과 <혼술남녀>

저녁이 있는 삶을 위해

한 정치인의 오랜 캐치프레이즈를 이야기하려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연관은 있는 이야기다.


매주 마포구에 위치한 교회를 가는 길에 당인리 발전소 앞길을 지나게 된다. 그곳에는 몇 년 전 한국적 현실에는 다소 어색한 작은 '라운드어바웃(roundabout)'이 하나 생겼다. 라운드 어바웃은 차량이 둥그런 원을 빙글 돌다 원하는 방향으로 갈 수 있게 하는 교통체계인데, 프랑스 파리 개선문 앞의 둥그런 차량 행렬을 떠올리면 된다. 정부 관계자와 확인은 하지 못했지만, 당인리 발전소 앞의 조그마한 라운드어바웃은 애초에 스위스, 프랑스 식의 교통체계를 염두에 두고 만들었다고는 할 수 없을 정도로 규모도 작고, 차량 통행도 거의 없는 곳에 설치되었기는 하다. 그러나 그 라웃드어바웃은 유럽에 거주하던 시절을 떠올리게 한다.


라운드어바웃의 장점이라면 길이 헷갈릴 때 원을 계속 돌며, 정확한 방향을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이다. <따뜻한 경쟁: 패자 부활의 나라 스위스 특파원 보고서>의 저자 맹찬형 기자는 스위스의 라운드어바웃 교통체계를 해설하다, 사회적 안전망에까지 사유의 폭을 넓혔다.


"라운드 어바웃은 실수를 해도 손쉽게 진로를 수정할 수 있는 체계다. 길을 잘못 들면 여러 번의 방향 전환과 신호등을 거쳐 먼 길을 되돌아가야 하는 한국의 교통 체계와는 사뭇 다르다. 라운드어바웃을 통과할 때마다 교육과 복지, 고용 등 사회의 여러 부문에 패자 부활을 위한 장치를 마련해 놓은 유럽의 사회구조가 교통 체계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 <따뜻한 경쟁: 패자 부활의 나라 스위스 특파원 보고서 (서해문집, 2012)> 중


제네바에서 일을 할 때, 주말마다 홀로 장을 보던 프랑스-스위스 국경 근처의 페르니 볼테르라는 마을의 마트에 자주 가곤 했다. 마트로 가는 길의 라운드어바웃이 아직 생생하다. 일단 라운드어바웃에 들어가면 그 차들이 우선이다. 라운드어바웃 내의 차량들이 먼저 길을 찾을 때까지, 다른 차량은 기다렸다가 합류를 한다. 이 책을 읽고 문득 그때 생각이 나, 당인리 발전소의 라운드어바웃을 한 번 돌아보는 데, 직진하는 차들이 무섭게 달려와 현실을 직시할 수 있었다.


월스트리트 저널은 한국을 '고단한 근로자의 나라', '워커홀릭의 천국'으로 묘사한 적이 있다. 조선일보는 한국 직장인의 연간 근무시간이 2,256시간.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 중 1등이면서, OECD 평균의 1.3배에 달하는 수치라고 보도하기도 했다. 2012년의 로이터통신의 조사에 따르면, 한국의 직장인 중 19%만이 행복하다고 대답했다.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다. 그러나 더 안타까운 것은 그렇게 행복하지 않게 일을 하고도, 노동 생산성(productivity)은 OECD 국가 중 가장 낮은 축에 속한다는 것이다. 한국 시스템에서 교육을 받고 일을 하다, 유러피언식의 업무와 일상을 피부로 체험했을 때 월스트리트 저널의 묘사에 동의할 수밖에 없다는 결론을 내렸다. 


"내일은 급하게 휴가를 써야겠어요. 아들 녀석이 학교에서 축구 경기에 출전한답니다."


독일의 한 연구소에서 일했던 지인(유럽인)의 이야기다. 그곳에서는 일터에서 '아들의 축구경기가 있으니 급하게 휴가를 내겠다'는 말이 자연스레 통한다. 가정에 대한 배려가 서로에게 중요하기 때문이다. 스위스는 슈퍼마켓이 저녁 7시면 모두 문을 닫는다. 슈퍼마켓 직원의 복지가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결국 그 복지는 일터에 있는 다른 시민들에게도 돌아간다. 비싼 외식을 할 생각이 아니라면, 일터에서 적어도 6시에는 퇴근을 해야 하기 때문이다. 이런 사정상 회사에서도 자연히 직원을 귀가시킬 수밖에 없는 구조다. 야근이라는 것이 개념상 힘들 수밖에 없다. 물론, 일이 많을 때도 허다하지만, 그럴 경우에도 대부분 귀가해서 나머지 일을 한다.


이민생활을 하다 귀국한 사람들은, '한국이 참 살기 편하다'라는 말을 자주 하곤 한다. 그건 반만 맞는 말이다. 24시간 동안 운영하는 음식점, 새벽 1시에 배달하는 치킨집. 그리고 대리운전. 그러나 그 이면에는 우리의 삼촌이 밤을 새우며 일하고, 조카가 통닭을 들고 밤거리를 질주하고 있다. 그리고 다른 어느 날에는 우리 역시 늦게까지 일을 하고 그 통닭을 먹고, 대리운전을 불러 귀가하는지도 모른다. 편리성이라는 말로 포장된 고단한 근로자의 천국. 우리는 혹시 서로가 서로를 힘들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진지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능력 있는 직장인들의 목표 중 하나는 해외지사로 파견을 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 다른 경쟁이 기다리고 있다. 파견을 위해서는 사내 경쟁에서 이겨 야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요즘 기이한 현상이 일어나고 있다고 한다. 해외파견을 3년에서 길게는 7년까지 마치고 돌아온 인력은 보통 조직 내에서도 앞길이 보장된 엘리트 대우를 받는데, 이들이 회사를 그만두는 비율이 높아지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선진국의 일상을 체험한 고급 인력들이 출세보다는 삶의 질에 방점을 두기 시작했다는 것을 보여주는 예다. 우리는 어떻게 희망을 찾아야 할까? 아들의 축구 경기에 갈 수 있는 삶을 살려면, 많은 고민과 '공동의' 용기가 필요할 것 같다.


2013년, 전향적인 복지시스템을 갖추고 ‘하지 말아야 할 33가지’라는 회사 문화를 만든 '제니퍼소프트'란 회사가 세간에 회자가 된 적이 있다. 방송이 나간 다음 날은 회사의 웹사이트가 마비된 적도 있었다. 그럴 법도 한 이유는, ‘가족 전화는 그 어떤 업무보다 우선’이고, ‘회사를 위해 희생하지 말고, 당신의 삶이 먼저’라고 회사가 나서서 직원들에게 권유하고 있기 때문이다. 직원들에게 회사 지하에 위치한 수영장을 매일 한 번씩 사용하라고 권고하기도 한다. 


노동은 인간의 숙명이지만, 동시에 인간의 삶의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노동을 즐길 수 있다면, 삶이 행복해지는 것은 당연한 이치다. 워커홀릭(workaholic)이 되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던 산업화 시대와는 전혀 다른 차원의 경제구조에서 살아가고 있는 지금, 한국사회도 뿌리 째 변할 조짐이 보인다. 내 컨디션과 상관없이 정해진 규칙에 따라 터프하게 사는 것만이 과연 열심히 사는 걸까. 아들의 축구경기를 참석한 뿌듯한 마음이, 그렇지 못한 미안함과 아쉬움보다 생산성을 결국 높일 것이다. 


문재인 대통령은 후보자 시절 노동시간을 줄이겠다고 했다. 유승민 후보는 칼퇴근을 공약으로 내걸었고, 안철수 후보도 동의했다. 심상정 후보는 말할 필요도 없다. 혁신을 장려해 새로운 일자리를 만드는 것과, 그러한 일자리의 질을 높이는 것. 두 가지는 같이 고려되어야 하는 문제다. 언뜻 보기에 대통령과 야당의 유력 정치인 모두 우리사회의 문제를 알고 있는 듯 하다. 대통령 집무실에 설치될 일자리 상황판에 근로시간 단축, 일자리 환경 등에 대한 수치가 매일 보고가 된다니 두고 볼 일이다.


그래서, 얼마 전 CJ E&M에 입사해 <혼술남녀>를 만들다 세상을 뜬 이한빛 군의 인생이 더 슬프다. 상명하복 군대문화와 폭언, 비정규직 해고, 선지급금 환수, 20시간의 과도한 노동. 그가 아파했던 부분이다. 동시대를 사는 선배로서 미안하고 또 미안하다. <경향신문>에 실린 제자의 죽음에 부쳐 쓴 스승의 편지는 많이 아프다.


‘저녁이 있는 삶’이라는 구호, 그래서 지금도 유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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