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가능한 발전의 시대정신(Zeitgeist)
요즘 국내외 어디를 가나 “지속가능한 발전 (sustainable development)”에 관한 이야기다. 브라질 아마존에서는 콩 (soy) 재배, 목축업 (cattle ranching) 등으로의 이유로 사라지는 산림 때문에 골 치고,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는 겨우 내내 ‘게르(ger)’에서 발생하는 연기로 뒤 덥혀 있고, 중국 베이징은 석탄화력발전소가 내뿜는 연기로 여기저기 기침소리가 들린다. 기후 변화로 인한 해수면 농도 상승으로 살 터전을 잃어가는 투발루(Tuvalu)나 몰디브(Maldives) 사람들 이야기는 이제 익숙한 이야기가 됐다. 우리나라도 중국의 황사 이동 등 월경성 대기오염, 국내 산업계의 온실가스 배출 등으로 인해 짙어진 미세먼지 농도 문제로 육아 커뮤니티가 발칵 뒤집히기도 했다. 모두 우리의 삶을 지속 가능하지 않게 하는 현상들이다. “유행어(buzzword)”를 넘어, “시대정신(zeitgeist)”이 됐다. 전 세계적인 현상이다.
“지속 가능한 발전”, 이 거대한 개념은 도대체 어떻게 정의를 할 수 있을까? 어깨에 힘이 들어간 학문적 용어를 사용하지 않고 말이다.
사실 간단하다. 아무리 일을 열심히 해도 건강을 잃으면 소용이 없다. 지속 가능하게 일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과 가정생활의 균형을 최적으로 유지하는 것이 행복을 위한 전제조건이다.
지속 가능하다는 것은 결국 어떤 상태가 유지되는 것이다. 적절한 상태를 유지하며 계속 나아가는 것이다.
정의를 하기 전에 이해해야 할 한 가지 중요한 개념은, 지속 가능한 “성장(growth)”이 아니라, 지속 가능한 “발전(development)”이 맞는 표현이라는 점이다.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표현은 근본적으로 성립이 되지 않는 개념이기 때문이다.
성장이라는 사전 뜻은 “생물체의 크기, 무게 부피가 자라서 점점 커진다”는 뜻이다. 그런데, 지구 생태계(ecosystem) 자체는 성장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지속 가능한 성장’이라는 표현은 모순어법(oxymoron)이다. 예를 들어 GDP라는 경제 지표를 놓고 보면, 경제는 계속 성장할 수 있지만, 본래 우리가 사는 지구 생태계 자체는 성장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경제’도 지구 생태계의 하부 조직일 뿐이다. 쉽게 말하면, 토지는 제한되어 있는 데, 한없이 건물을 지을 수 없는 이치와 같다. 반면 ‘발전’은 “더 낫고 좋은 상태나 더 높은 단계로 나아감 또는 일이 어떤 방향으로 전개됨”을 뜻한다. 그러니 발전은 지속 가능하다. [1]
저탄소 녹색성장 국가정책을 실행했을 때, 방향과 비전 모두 탁월했지만, 4대 강 사업 등 몇 가지 실패를 했다. 그것은 애초에 프로젝트를 개발할 때, ‘녹색성장’이라는 개념에 대해 깊은 숙고 없이, ‘녹색’만 붙이면 ‘성장’도 지속 가능할 것이라는 판단 착오를 저질렀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2015년부터 유엔은 “지속 가능한 발전목표(Sustainable Development Goals; SDGs)”를 제정해 거대한 개념을 측정할 수 있는 수치로 환산해 국가적인 노력을 지원하고 있다. 그전에 먼저 집고 넘어갈 것은 새천년 개발목표(MDGs)라는 개념이다. 새천년 개발목표는 간단하게 말해 2000년 새천년을 맞이하며, 국제가회가 유엔을 통해 빈곤, 교육, 환경보전 등 ‘세계가 풀어야 할 문제’를 측정할 수 있는 목표로 설정해 놓은 것이다. 그것이 더 광범위한 개념으로 발전된 형태가 지속가능한 발전 목표(SDGs)라는 것이다.
아래 그래프는 지구라는 생태계에서 사용되는 토지의 현황을 개념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크게 토지는 경제적인 동인을 위해 사용되는 토지와 자연 그대로의 지역으로 나눌 수 있는데, 문제는 자연 그대로의 지역이 계속 줄어들고 있다는 것이다. 인간의 경제활동 때문이다. 농업의 확장으로 산림이 소실되고, 산업계의 이산화탄소 배출이 기후변화를 야기하고 있다. 애초에 의도는 그러하지 않았지만, 결과는 생태계의 붕괴로 이어졌다. 이제, 그 폐해가 이제 한계점으로 치닫고 있다. [2] 지금은 어떤 행위가 환경에 미치는 악영향에 대한 과학적 근거를 가지고 측정할 수 있는 방법이 충분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제 환경에 반하는 경제활동 모두 ‘미필적 고의(未必的故意)’가 있다고도 볼 수 있다.
건강한 생태계가 사실 산업계가 배출하는 온실가스를 흡수하고, 조절(regulating), 문화(cultural), 물자(provisioning), 부양(supporting) 등의 보이지 않는 서비스를 우리 경제에 제공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우리는 생태계를 항상 당연한 것처럼 여겨왔다. 그 결과 우리나라도 근래 미세먼지 등으로 인한 폐해를 극적으로 체험하고 있는 중이다. 비극은 생태계와 자연의 가치가 꼭 이렇게 소실된 후에서야 (ex-post) 깨닫게 된다는 데 있다. 왜, 진작에 우리는 생태계와 자연 그대로가 제공하는 경제적, 환경적, 사회적 가치를 반영하여 의사결정을 하지 않았던 것일까?
이 질문을 던지는 것이 우리가 헤쳐나가야 할 거대의 논의의 시발점이다.
[1] 탄소순환과 녹색성장, 지식의 지평6호 (한국학술협의회, 2009), 206-207 페이지
[2] KIM, J et al, Bridging Policy and Investment Gap forPayment for Ecosystem Services, GGGI 20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