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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hn Mun Jan 03. 2022

<지구를 위한다는 착각> 마이클 셸런버거

#지구를위한다는착각 #마이클셸런버거 #부키 [평점 : 9.3 / 10.0 ]


"지구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것은 모두가 인지하는 사실입니다. 일종의 윤리적인 사고방식이자 사회적 정의입니다. 이를 위한 일차적인 방법들 '탄소배출을 줄이고 환경파괴를 억제하며 인간을 포함한 다양한 생명들을 지켜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도 큰 이견이 없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다음 단계로 넘어가면 어려워지기 시작합니다. 구체적인 시행방안은 사회적 합의가 쉽지 않습니다.


예를 들어 전기를 생산하는 방식을 생각해보겠습니다. 탄소배출을 줄이기 위해 반드시 개선되어야 할 영역입니다. 혹자는 풍력, 태양력으로 대표되는 재생에너지 사용을 주장합니다. 다른 이들은 재생에너지의 한계를 지적하며, 현실적인 대안으로 원자력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전기 소비를 극단적으로 줄여야 한다는 주장도 있습니다. 이 모든 방안들이 유기적으로 함께 시행되어야 하지만 우리는 우선순위를 정해야 합니다. 여기서 합의점을 찾기란 무척 어렵습니다.


이 책의 저자인 마이클 셸런버거는 지구를 위하는 나름의 방법을 전하고 있습니다. 경제적으로 합리적인 기술적 방안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일부 이견이 있을 수도 있고 특히 극단적 환경주의자라면 불편할 수도 있을 듯합니다. 만약 어느 독자가 그레타 툰베리의 열성정인 팬이라면... 아마 책을 끝까지 읽기 힘들 것 같습니다. 지구 위기로 인류가 살아남을 수 없다는 환경 종말론보다는, 극복할 수 있다고 믿는 환경 휴머니즘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자의 주장이 비윤리적인 사고방식을 포함한 극단적 기술만능주의를 표상하고 있지는 않습니다. 기술이 발전되면 모든 게 해결될 것이다라는 그런 무책임한 주장이 아닙니다. 제 기준에서는 꽤나 합리적인 대안들이 많이 보였습니다. 꼭 한번 끝까지 읽어볼 가치가 있는 책입니다. 아래는 책의 논리를 기억하기 위해 제가 요약한 내용입니다. 독서 전에 참고해주시면 어느 정도 도움이 될 듯합니다.


1. 저개발 국가를 개발하는 것이 환경에 도움이 된다 (Feat. 새로운 형태의 사다리 걷어차기)


- 에너지 효율을 높이는 것이 자연 파괴를 줄일 수 있음

   (농지를 개발하기 위한 화전민의 자연파괴 > 석탄발전소의 자연파괴)

- 산림을 충분히 파괴하며 탄소를 충분히 배출한 뒤 선진국이 저개발 국가의 발전을 가로막는 것은 이기적

- 충분한 전기를 사용하면서 플라스틱 렌턴(태양광을 확대하는 채광 방식의 실험 등)을 보급하는 실험은

   개발도상국민에 대한 기만

- 고밀도 에너지를 사용하면서 빈곤국들에게 저밀도 에너지를 강요하는 것은 위선적이며 비윤리적


2. 인공적인 제품을 사용하면 자연환경은 더 나아질 수 있다.


- 플라스틱의 개발로 자연 상태의 제품을 덜 사용하게 됨 (거북이 등껍질, 코끼리의 상아)

- 고래 사냥은 원주민의 생계를 위해 꾸준히 있던 활동이나, 고래 기름에 대한 수요가 증가하며 1차 대학살이 벌어졌음. 등유의 개발로 고래기름이 경제력이 떨어지자 고래 사냥이 감소함. 이와 같은 논리로 거북이 등껍질, 코끼리의 상아도 밀렵 위기에 처함

- 자연 그대로의 제품이 자연을 지킨다는 것은 허상임  


3. 현실적인 에너지 원자력 (Feat. 재생에너지는 현실적으로 모든 전력체계를 대체할 수 없다)

- 태양력과 풍력으로 모든 전력을 공급하려면 더 많은 산림과 녹지를 개간해야 함

- 개간된 녹지와 산림에 대한 피해는 재생에너지 옹호론자의 주장에 포함되어 있지 않음

- 조류, 박쥐, 곤충은 풍력타워로 인한 심각한 피해를 입고 있음

- 원자력 피해에 대한 공포는 과장되어 있음

- 원자폭탄과 원자력 발전은 기술적으로 완전히 다름

- 재생에너지의 기술발전을 기대하는 것보다 원자력 안전기술에 대한 발전이 더 빠름  


4. 환경 종말론 vs 환경 휴머니즘

- 환경 피해로 인류가 멸망한다는 주장은 엘리트 계층의 새로운 종교

- 맬서스식 인구폭발론, 기아 만연론과 환경 종말론을 비교해 볼 수 있음

- 환경 파괴로 인한 분노와 공포를 조장하는 것은 지적받아야함

- 인간의 특수성을 긍정하고 인류 문명과 인류를 증오하는 종말론을 재 판단해야 함



환경과 기후 문제에 관해 사람들이 주고받는 이야기 중 상당수는 잘못되었다. 우리는 최선을 다해 그 잘못된 정보를 바로잡아야 한다. 환경 문제를 과장하고, 잘못된 경고를 남발하고, 극단적인 생각과 행동을 조장하는 이들은 긍정적이고, 휴머니즘적이며, 이성적인 환경주의의 적이다. 그런 주장에 신물이 났기에 나는 이 책을 쓰기로 했다.


기후변화정부 간 협의체의 2018년 보고서와 언론용 보도자료에 진짜 적혀 있던 내용은 이것이다. 만약 우리가 산업혁명 이전 수준에 비해 평균 기온 상승을 1.5도 이하로 묶어 두고자 한다면 탄소 배출량을 2030년까지 45퍼센트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평균 기온 상승이 1.5도를 넘어서면 세상이 멸망한다거나 문명이 붕괴할 거라는 이야기를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는 한 적이 없다.


2012년에 있었던 일에 대한 오펜하이머의 설명을 들어 보자. “허리케인 샌디 때문에 사람들은 뉴욕을 떠났죠. 나는 그런 건 관리 불가능한 일이라고 보지 않습니다. 한시적 관리 불가능 상태일 뿐이죠. 말하자면 해수면이 4피트, 그러니까 1.2미터가량 높아진다 해도 인류 사회가 제 기능을 잃고 유지되지 못하는 일은 벌어지지 않습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이라면 해안가에서 더는 살 수 없거나 인도로 넘어가야 할지도 모르지만 말이에요.”


기후 변화에 사람들이 자동으로 적응하는 일은 발생하지 않을 것이다. 의심의 여지 없는 사실이다. 기후 변화에 더 취약한 사람들이 있고, 우리는 그런 이들의 처지에 더 신경 써야 한다.


다음번에 또 홍수가 날 때 베르나데테의 집이 무사할지는 콩고에 제대로 된 댐이 건설되고 수력 발전소가 돌아가느냐, 농경지 관개 시설과 홍수 처리 시스템이 갖춰지느냐에 따라 판가름 난다. 기후 변화 예측 모델 중 어떤 것이 맞고 틀리는지는 문제가 아닌 것이다. 베르나데테의 집이 안전할지는 그런 여건을 갖출 수 있는 돈이 베르나데테에게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결정된다. 베르나데테가 안전을 확보하기에 충분한 돈을 벌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다. 경제가 성장해 높은 소득을 올리는 것이다.


정부는 환경 보호 차원에서 그리고 사람들의 건강을 해칠 수 있다는 우려에서, 적당한 수준의 화재 발생을 용인하며 관리하는 식으로 접근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결과 평균 기온이 높아지지 않았을 때조차 산불 발생 빈도는 증가하는 현상이 나타났다.


“조사를 해 보니까 잘못된 정보가 무척 많더라고요.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쪽도 그렇지만 종말을 주장하는 사람들 쪽도 마찬가지였어요”


돌이킬 수 없는 티핑 포인트를 넘기게 될 위험은 지구의 평균 기온이 높아질수록 커진다. 그러므로 우리는 경제 발전을 저해하지 않으면서 온실가스 배출을 최대한 줄이고 평균 기온 상승을 최대한 억누르는 것을 목표로 삼아야 한다.


결론적으로 오늘날 지구 평균 기온은 산업화 이전에 비해 평균 2~3도 상승하는 선에서 머물 가능성이 높다. 티핑 포인트를 넘길 위험이 생기는 4도보다 확연히 낮은 수준이다.


나는 그에게 아마존이 지구 전체 산소의 주요 공급원이라는 말이 사실이냐고 물었다. “헛소리예요.” 넵스태드가 말했다. “그 말에는 과학적 근거가 없어요. 아마존이 생산하는 산소가 엄청나게 많은 건 맞지만 호흡하는 과정에서 산소를 빨아들이니까 결국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삼림을 개간하고 화석 연료를 사용한 덕분에 부를 쌓을 수 있었던 선진국들, 특히 유럽 국가들은 브라질이나 콩고 같은 열대 지방 국가들이 그들과 같은 방식으로 경제 개발의 길을 걷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럼 우리가 진정으로 원시림을 지키고자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 무엇보다 우리는 환경 식민주의environmental colonialism를 물리쳐야 한다. 또한 오래된 원시림을 가진 국가의 경제 발전을 지지해야 한다.


내가 25년 넘게 알고 있던 아마존의 현실과 너무나 동떨어진 이야기였다. 삼림 파괴와 화재 증가는 근본적으로 경제 성장을 원하는 대중의 요구에 정치인이 부응한 결과다. 자연환경에 대한 관심 부족 탓이 아니다.


부유한 국가들이 바다에 버려지는 플라스틱 쓰레기를 줄이고 싶다면 가난한 국가들의 쓰레기 처리 시스템 개선을 도와야 한다고 많은 전문가들은 생각한다. 2015년 이 분야 전문가 중 한 사람에 따르면 “개발도상국의 쓰레기 관리 기반 시설을 확충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그러기 위해서는 “저소득, 중소득 국가의 기반 시설에 확실한 투자가 요구된다.”


피게너는 요즘 걱정이 많다. 플라스틱 빨대 타령을 하다가 우리가 진짜 문제를 놓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업들이 플라스틱 빨대를 안 쓴다는 걸로 쉽게 면죄부를 얻으려 하지 않기를 바라고 있어요.” 피게너는 말했다. “5년 내로 우리가 플라스틱 빨대 같은 건 아예 논의할 필요조차 없어지기를 고대합니다. 많은 대안이 나와 주기를요.”


실제로 전 세계 도서 지역의 생물다양성은 평균 2배가량 상승했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외래종”이 들어온 덕분이다. 식물의 경우 한 종이 멸종할 때마다 대략 100여 종의 새로운 종이 유입된다.8 윌슨과 매카서가 걱정했던 것처럼 “외래종”이 “토착종”을 몰아내는 일은 흔치 않다.


마운틴고릴라를 사냥한 건 외국인들이지 현지인들이 아니었다. 그런데 유럽 식민주의자들은 고릴라를 지키겠다며 공원 예정 부지에 살고 있던 현지인들을 쫓아냈다. 벨기에의 알베르 1세는 자신의 이름을 따 그 땅에 앨버틴지구대라고 이름을 붙이더니, 수많은 사람이 이미 살고 있었을 뿐 아니라 20만 년 전 인류가 처음 태어난 그곳에서 원주민을 몰아내기 시작했다.


환경 보존 과학자들은 “대단히 내향적이고 분석적인 사람들이죠. 과학자들은 자기들끼리만 모여 있는 어느 연구실 구석에서 대단히 큰 결정을 내려요. 현지인들로서는 억압적이고 부담스럽다고 느낄 만한 그런 결정을 말이죠. 과학자들에게 악의가 있다고 할 수는 없어요.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겠다는 거죠. 하지만 과학자와 현지인의 우선순위는 다를 수밖에 없고, 현지인은 존중받지 못한다는 생각에 분통이 터지는 거죠.”


가난한 개발도상국의 의류 공장과 다른 여러 소비재 공장이 하는 일은 멸종저항이나 그린피스가 주장하는 것과는 정반대라고 할 수 있다. 공장은 삼림 파괴를 불러오는 주범으로 지목받고 있지만 실은 숲을 지키는 원동력이다. 지금까지 그래 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환경 문제의 해법은 더 적은 땅에서 더 많은 식량을 생산하는 것이다. 1961년 이래 농경지의 총면적은 고작 6퍼센트 늘어났지만 전체 식량 생산량은 놀랍게도 300퍼센트나 증가했다.


인도네시아 같은 나라가 산업화를 경험하면 우선 경제 성장에 따라 단위당 에너지 소비가 늘어난다. 하지만 이후 미국처럼 탈산업화 단계에 이르면 경제 성장 대비 에너지 소비가 줄어들게 된다.


그린피스나 멸종저항의 주장은 틀렸다. 가난한 나라에 에너지 밀도 높은 공장이 들어서는 것은 숲을 위협하지 않는다. 공장이 떠나 버릴 때 숲은 진짜 위기에 빠진다.


“2070년까지 대기 중 이산화탄소 농도를 최소화하고 싶다면 인도의 석탄 화력 발전을 더욱 늘려야 해요. 말도 안 되는 소리처럼 들리죠. 석탄은 끔찍한 탄소 배출원이니까. 하지만 석탄을 더 많이 땐다는 것은 인도 사람들이 더 부유해진다는 말과 같아요. 더 부유해지면 아이를 덜 낳겠죠. 아이를 덜 낳으면 인구 성장이 멈추고, 인구가 줄어들면 탄소 배출량이 낮아집니다. 그럼 2070년쯤에는 사정이 훨씬 나아질 거예요.”


등유는 미국의 조명용 액체 연료 시장을 빠르게 잠식해 나가 고래기름의 자리를 빼앗았다. 그리하여 고래들은 목숨을 건질 수 있었다. 고래기름이 더는 필요가 없어졌기 때문이다. 고래 사냥이 정점에 달했을 무렵 포경 산업에서 생산해 내는 고래기름은 매년 60만 배럴에 달했다. 드레이크가 유전을 개발한 후 석유 산업은 3년도 되지 않아 같은 양의 기름을 생산해 냈다.


가격이 낮아진 까닭에 고래기름의 생산이 줄고 고래기름 자체가 희귀해졌다. 그러니 고래기름을 식물성 기름으로 대체하는 속도는 더 빨라질 수밖에 없었다. 경제학자들이 내린 결론은 다음과 같다. “경제 성장으로 인해 고래기름을 원료로 쓰는 제품의 수요가 하락했고, 고래의 개체 수가 줄어들다 보니 고래를 잡는 데 들어가는 비용 역시 날로 늘어만 갔다.


고래를 구한 것은 국제 조약이 아니라 식물성 기름이었다


어떤 각도에서 보더라도 천연가스는 석탄보다 깨끗하다. 천연가스는 석탄보다 17~40배나 적은 이산화황을 배출한다. 일산화황은 석탄이 배출하는 양과 비교하면 소량에 지나지 않고, 수은은 거의 배출하지 않는다. 대기 오염 유발과 사망의 관계를 놓고 볼 때 석탄은 천연가스에 비해 8배나 많은 인명 손실을 야기한다. 석탄이 아닌 천연가스로 발전을 하면 물 소비 역시 25~50퍼센트까지 절감할 수 있다.


《동물을 먹는다는 것에 대하여》에서 포어는 공장식 축산이 방목형 축산보다 자연환경에 더 나쁜 영향을 미친다는 주장을 편다. “만약 우리 소비자들이 주어진 땅이 제공하는 만큼만 돼지와 닭을 먹게끔 스스로 욕망을 조절할 수 있다면 방목형 축산에 제대로 반박할 방법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포어가 말한 것처럼 우리가 “인구 과잉” 시대를 살고 있다면 어떻게 방목형 축산이 자연에 더 이로울 수 있단 말인가?


공장식 축산을 버리고 동물을 자유롭게 풀어 놓는 방목형 축산으로 이행하고자 한다면 훨씬 더 넓은 땅이 필요하다. 결과적으로 마운틴고릴라나 노란눈펭귄 같은 위기에 빠진 야생 동물의 서식지는 줄어들 수밖에 없다.


흔히 동물권 운동가들은 육식을 노예 제도에 비유하곤 한다. 노예제가 비윤리적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면 그 결과로 사람들은 자유를 얻게 된다. 반면 육식이 비윤리적이라는 사회적 합의가 이루어지면 가축들은 ‘자유’를 얻는 게 아니다. ‘존재’ 자체가 사라지고 만다.


캘리포니아대학교 버클리캠퍼스 저널리즘대학원 교수인 마이클 폴란MIchael Pollan은 2007년 출간한 《잡식동물의 딜레마The Omnivore’s Dilemma》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는 채식주의자의 윤리적 명료함을 보면 내 안에서 질투심이 끓어오른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하지만 어떤 면에서는 측은한 기분도 든다. 순수한 존재가 되고 싶은 마음이란 그런 것이다. 그들의 사고방식은 대체로 현실 부정에 입각해 있고 일종의 오만을 내포하고 있다.”


교조적 채식주의자들은 교조적 환경주의자와 같은 문제를 지니고 있다.


콩고 사람들이 마운틴고릴라를 사냥해 잡아먹거나 하지는 않지만 다른 야생 동물들은 사냥의 대상이다. 놀랍게도 매년 220만 톤의 야생 동물을 잡아먹고 있다. 원인은 간단하다. 가축을 길러 생산하는 저렴한 육류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환경주의자라면 사람들이 고기를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가축을 길러 제공하는 일을 꺼리지 말아야 한다. 이는 높은 우선순위를 차지하는 과제다. 가축을 기르는 데 소요되는 땅을 줄일수록 사람과 야생 동물이 살아갈 수 있는 터전이 넓어진다.


나는 종종 방사능 폐기물이 걱정된다는 사람들과 이야기를 나눈다. 그런데 그중에서 그게 왜 위험한지 정확하게 설명하는 사람은 별로 찾아볼 수가 없다. 그들은 원자력 발전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의식적이건 무의식적이건 핵무기의 이미지에 사로잡혀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사용 후 핵연료의 연료봉을 폭탄으로 만드는 일은 그리 간단하지 않다. 거대한 저장 용기의 내용물을 크고 복잡한 설비에 넣어 처리해야 하는데 그런 설비와 시설을 갖춘 나라는 전 세계에 몇 나라밖에 없다.


원자력을 긍정적으로 바라본 것은 시리 혼자만이 아니었다. 1960년대에는 그랬다. 대부분의 환경 보호 활동가들이 원자력을 석탄이나 수력 발전보다 더 깨끗한 에너지원으로 선호했다. 대부분의 민주당원과 진보주의자 역시 마찬가지였다. 미국, 유럽을 비롯해 세계 각지에서 원자력을 깨끗하고, 에너지 밀도가 높으며, 사실상 무제한의 에너지를 공급하는 원천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널리 호응을 얻고 있었다.


이미 20여 년간 핵무기의 공포를 학습하며 커 온 세대가 원자력 발전과 원자력 폐기물이 대중의 건강에 큰 위험 요소가 된다고 불안에 떨면서, 구체적으로 그 위험이 무엇인지 묻고 따지지도 않은 채 잘못된 정보를 계속해서 퍼뜨리게 된 것은 그러므로 전혀 놀랄 일이 아니다.


소련과 일본에서 벌어진 일을 살펴보면 원자력에 대한 공포가 사람들의 정신 건강에 부정적인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방사능에 노출된 사람들을 무언가에 오염된 존재로 여기는 것부터가 잘못이다


한국은 원자로의 출력을 40퍼센트 키우는 데 성공했다. 기존에 1000메가와트의 전력을 생산하던 원자로에서 이제는 1400메가와트를생산한다(아랍에미리트에 4기를 수출한 한국형 표준 원자로인 APR-1400을 가리킨다. APR-1400은 미국 외 국가에서 설계한 원전 중 최초로 미국원자력규제위원회Nuclear Regulatory Commission, NRC의 설계 인증을 획득했다-옮긴이). 엄청난 효율 향상일 뿐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큰 이익이다. 원자로의 크기를 늘리면서 끔찍한 일정 지연을 겪고 있는 프랑스와 비교하면 더욱 그렇다


2018년 전 세계적으로 신재생 에너지가 1차 에너지원 중 차지하는 비중이 11퍼센트에 달했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중 64퍼센트(다시 말해 전체 1차 에너지원 중 7퍼센트)는 수력 발전 댐에서 나온 것이다.6 그런데 대부분의 댐은 선진국에 세워져 있다. 가난한 개발도상국의 댐 건설은 부유한 나라에서 온 환경주의자들에게 종종 가로막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여러 국가에서 풍력 발전기는 박쥐의 생태를 위협하는 가장 큰 요인이라는 것을 리노스는 일찌감치 알게 되었다. 풍력 발전기는 박쥐의 서식지를 망가뜨릴 뿐 아니라 박쥐에게 흰 코 증후군white-nose syndrome이라는 질병을 일으키기 때문이었다.


풍력 발전기는 철새가 서식하고 이동하는 넓은 영역을 점령했고, 그에 따라 멸종 위기에 몰려 보존 가치가 높은 대형 조류들에게 가장 큰 위협 중 하나가 되고 있다


2019년 세계 최대 컨설팅 그룹 매킨지는 독일의 에너지 전환이 경제와 에너지 수급에 심대한 위협을 가했다는 보고서를 발표했다. “기후 변화 대응, 공급 안정, 경제적 효율이라는 에너지 산업의 세 꼭짓점 모두에서 문제점이 나타나고 있다.”


태양광 단지를 늘려 나갈 때는 다른 산업 시설을 확장할 때와 마찬가지 제약을 받을 수밖에 없다. 건설 지역의 야생 환경을 통째로 들어내야 한다는 뜻이다. 아이밴파 발전소를 짓기 위해 건설업자들은 환경학자들을 고용해야만 했다. 건설 예정지에 살고 있는 멸종 위기 사막거북을 지키기 위해서였다. 거북들을 굴에서 꺼내어 픽업트럭 짐칸에 싣고 옮겨 가 우리에 가둬 두었는데 거기서 많은 거북들이 죽고 말았다.


2021.12.29


태양광 패널을 설치할 때는 원자력 발전소에 비해 시멘트, 유리, 콘크리트, 강철 등의 자원을 16배나 많이 소비하며69 300배나 많은 폐기물을 만들어 낸다


모든 사람이 오직 신재생 에너지에만 의존해 살아간다고 해 보자. 그 경우 인류는 문명을 유지하기 위해 지금보다 100배에서 1000배나 넓은 땅을 사용해야 한다.


지금 미국에서 소비되는 모든 에너지를 신재생 에너지원에서 생산한다면 미국 전체 국토의 25~50퍼센트를 에너지 생산에만 써야 할 것이다.87 반면 오늘날의 에너지 시스템은 미국 전체 국토의 고작 0.5퍼센트만을 사용하면서 미국 전역에 필요한 에너지를 공급하고 있다.


곤충 무리는 먼 거리를 이동할 때 특정한 기류를 사용한다. 그리고 풍력 발전기는 그런 기류를 활용할 수 있는 높이로 건설된다. 오클라호마주에서 곤충의 비행을 연구한 과학자들은 곤충들이 150~250미터 상공에서 가장 높은 밀도를 보인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그런데 오클라호마는 풍력 발전이 가장 성행하고 있는 지역 중 하나로, 거대한 풍력 발전기는 대부분 지상에서 60~220미터 사이에 건설된다.


지역 환경 운동가 리사 리노스는 이상한 사실을 발견했다. 야생 생태계를 지키기 위해 싸우다 보면 미국에서 가장 큰 환경 단체들과 대립하는 일이 적잖이 벌어졌던 것이다.


그 원인은 심리적이기도 하고 이념적이기도 한데, ‘자연적인 것이 좋다appeal to nature’는 낭만적 오류가 바로 그것이다. 이런 오류에 빠질 경우 사람들은 신재생 에너지가 화석 연료나 우라늄보다 더 자연적이라고 착각한다. 그리고 자연적일수록 환경에 더 이롭다고 잘못 생각한다.


셀레브리티들이 고에너지 소비 생활을 과시하는 게 문제가 아니다. 본인들은 그런 삶을 즐기면서 남들에게는 에너지 소비를 줄이는 것이 올바른 삶인 양 떠벌리는 게 문제다. 어떤 평범한 영국인이 말한 것처럼 “이제 우리한테 어떻게 살라고 설교 그만하고 당신들이 모범을 보이며 살아라.


부유한 나라의 환경주의자들이 콩고 같은 나라의 가난을 초래하는 근본 원인은 아니지만 최소한 책임은 있다. 가난하고 낙후된 지역 사람들이 산업화와 개발의 혜택을 받지 못하도록 그 길에 들어서는 것을 어렵게 만들고 있는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


이미 우리는 신재생 에너지로는 산업혁명을 이룰 수 없었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산업화 이전 사회는 저에너지 사회였다. 석탄은 산업화 이전의 인류를 유기농 태양 에너지 경제로부터 해방시켰다. 이 책이 나온 1987년까지 화석 연료가 아닌 신재생 에너지와 에너지 효율을 통해 가난에서 벗어난 나라는 단 한 곳도 없었다.


가난한 국가에 화석 연료와 수력 발전소 등으로 저렴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방안에 대해 모든 환경주의자가 반대하는 것은 아니다. 선진국을 부유하게 만들어 준 기술을 가난한 개발도상국에는 도입하지 못하도록 가로막는 행동은 비윤리적이다. 내 경험에 따르면 선진국에 사는 환경주의자 상당수가, 아니 어쩌면 대부분이 이 생각에 동의하고 있다.


1977년 얼릭과 홀드런은 “모든 천연자원의 개발, 관리, 보존, 분배”에 대한 국제적인 통제를 제안했다.90 많은 환경 단체와 유엔 기구가 오늘날 그 길을 걷고 있다. 기후 변화 대응과 생태 보호란 이름 아래 개발도상국의 에너지와 식량 정책을 통제하고자 한다.


그래서 일부 맬서스주의자들은 기발한 주장을 하기 시작했다. 원자력이 ‘너무나’ 저렴한 에너지를 ‘너무나’ 풍부하게 공급하는 것, 그게 바로 문제라는 것이었다. 시에라클럽 사무총장이 디아블로 원자력 발전소에 반대하며 한 말을 들어 보자. “만약 이 발전소가 제공하는 에너지 때문에 이 나라의 인구가 향후 20년간 2배로 늘어난다면 [캘리포니아의] 아름다운 풍광은 파괴되고 말 것이다.”


세계 인구 증가율이 정점을 찍고 내려오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맬서스주의자들은 다른 길을 모색하기 시작했다. 인구 과잉과 자원 고갈 대신 기후 변화를 빌미로 종말론 공포 몰이를 벌여 나간 것이다.


조야슈리는 나를 한 가난한 동네로 데려갔다. 그곳에서는 한낮에도 어두운 집 안을 태양광을 이용해 밝히는 실험이 벌어지고 있었다. 지붕에 구멍을 뚫고 플라스틱병을 끼워 넣어 산란하는 빛으로 집 안을 밝히는 이른바 ‘채광daylighting’ 방식이었는데 서구에서는 널리 긍정적인 반응을 얻고 있었다. 조야슈리가 내 소감을 물었다. 나는 서구 NGO들이 판잣집 천장에 플라스틱병을 끼워 놓고는 뭔가 대단한 일을 한 것처럼 으쓱거리는 게 모욕적으로 느껴진다고 답했다. 조야슈리 또한 같은 생각이었다.


북극곰은 19개의 하위집단subpopulation으로 분류된다. 그중 두 하위집단의 개체 수는 늘었고, 네 하위집단은 줄어들었고, 다섯 하위집단은 일정하게 유지되고 있으며, 나머지 여덟 하위집단은 전혀 파악이 되지 않은 상태다. 전반적인 추세를 제대로 알 수 없는 상황이다.


우리는 그 대답을 어느 정도 알고 있다.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 보고서의 과학적 기반 자체는 대체로 건전하다. 하지만 〈정책 결정자를 위한 요약〉과 언론 보도자료, 보고서 저자들의 성명과 언론 인터뷰 등이 문제다. 그것들은 이념적 동기를 가지고 과장하는 경향을 보인다. 중요한 맥락을 함부로 생략한다. 우리가 살펴본 바와 같이 기후변화정부간협의체 보고서 저자들과 언론 보도자료는 해수면 상승을 “관리 불가능하다”라고 주장한다. 세계 식량 공급은 풍비박산 날 위기에 처해 있고, 채식을 하면 탄소 배출을 대폭 줄일 수 있으며, 가난한 나라들은 신재생 에너지를 도입해 부유해질 수 있고, 원자력 에너지는 위험하다고 말한다.


‘자연적인 것이 좋다’ 오류는 가령 거북 껍질, 상아, 야생 어류, 유기농 비료, 나무 연료, 태양광 발전 단지 같은 것을 “자연”의 산물로 여긴다. 그러면서 그런 “자연적인” 것이 화석 연료에서 추출한 플라스틱, 양식 어류, 화학 비료, 원자력 발전소처럼 “인공적인” 것보다 더 친환경적이며 인류에게 좋다고 본다.


이런 생각은 두 가지 측면에서 오류라고 할 수 있다. 첫째, 인공적인 것 역시 자연적인 것만큼이나 자연적이다. 다만 상대적으로 최근에 만들어졌을 뿐이다. 둘째, 더 오래된 “자연적인” 것을 좋아하면 지구와 인간 모두에 “나쁘다”. 만일 우리가 바다거북, 코끼리, 야생 어류를 보호하고자 한다면 자연적인 것은 결코 “좋지 않다”.


오늘날의 환경주의는 일종의 세속 종교다. 기성 종교색이 옅은 고학력층을 위한 신흥 종교인 셈이다. 신도들은 주로 선진국과 일부 개발도상국에 거주하는 상위 중산층으로 이루어져 있다. 환경주의는 신도들에게 개인적으로 또 집단적으로 새로운 인생의 목적을 제공한다. 환경주의는 좋은 사람과 나쁜 사람, 영웅과 악당을 구분할 수 있는 기준이 되어 준다. 또한 환경주의는 과학의 이름으로 설파되는데, 따라서 지적인 권위까지 확보하고 있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할 일은 많다. 문제는 그 방향이다. 현재의 긍정적인 흐름을 더욱 키워 나가야 한다. 저에너지 농경 사회로 돌아가자는 퇴행적 움직임으로 지금까지 이룩한 발전을 되돌리려 해서는 안 된다.


나는 기후 변화와 삼림 파괴, 멸종 등을 둘러싼 분노와 공포 조장을 지적하는 것이다. 우리는 그런 환경 운동이 키우고 있는 슬픔과 고독에 주목해야 한다. 그런 환경 운동의 많은 부분은 잘못되었다. 해소할 길 없는 불안을 퍼뜨리고, 사람들을 무기력하게 만드는 이념을 유포하며, 실재하는 증거를 호도하거나 부정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이성주의를 넘어서 휴머니즘을 다시 포용해야 한다. 인간의 특수성을 긍정하고, 인류 문명과 인류 자체를 증오하는 맬서스주의와 환경 종말론에 맞서야 한다. 과학자든 언론인이든 활동가든 환경 휴머니스트로서 우리는 보편적인 인류 복지와 환경 진보라는 초월적인 도덕적 목적에 먼저 확고히 헌신해야 한다. 이성적인 판단과 논박은 그다음 일이다.


환경 휴머니즘의 핵심 가치를 밝힐 때가 됐다. 부유한 나라들은 가난한 나라들의 경제 개발을 부정하지 말고 반드시 도와야 한다. 특히 부유한 나라들은 지금 당장 가난한 개발도상국들에 채운 개발과 에너지 생산의 제약이란 족쇄를 풀어야 한다. 자신들은 고밀도 에너지를 쓰면서 빈곤국들은 저밀도 에너지를 쓰도록 강요하는 것, 자신들이 가난을 떨쳐 내고 풍요를 이룬 길에 개발도상국이 들어서지 못하게 막는 것은 위선적일 뿐 아니라 비윤리적이다. 개발의 길에 늦게 들어서는 나라일수록 산업화를 이루기는 더욱 어려워진다.


또한 2020년 1월에는 기후학의 현황에 대해 의회에서 증언을 했다. 20년이 넘는 세월 동안 기후 변화에 대한 견해는 기후 변화를 부정하는 사람들과 기후 변화를 과장하는 사람들로 양극화되었다고 나는 지적했다. 양쪽의 극단주의 모두를 배격하려는 일부 과학자, 언론인, 활동가가 마침내 등장한 것은 실로 기쁜 일이다.


환경 휴머니즘은 결국 환경 종말론을 이겨 낼 것이라고 나는 믿는다. 대다수 사람들은 번영과 자연을 동시에 원하기 때문이다. 자연을 위해 번영을 희생해야 한다고 믿는 이들은 극소수다. 사람들은 단지 자연을 지키면서 동시에 풍요로워질 수 있는 방법에서 혼란을 겪고 있을 뿐이다.


경제가 어느 반열에 오르고 생산성이 증가하면 농업에 투입되는 토지 또한 줄어들기 때문에 숲의 면적이 늘어난다. 높은 에너지 밀도를 통해 생산성을 증대시키는 것, 사람은 더 좁은 곳에 모여 활기차게 살고 더 많은 땅을 자연의 품으로 돌려주는 것, 그것이 현실 속에서 달성 가능한 환경주의의 길이다.


셸런버거는 환경 휴머니즘을 이야기한다. 인간이 스스로를 위해 더 나은 삶의 여건을 만들고, 경제를 발전시키고, 밀도가 높은 에너지원을 쓰는 것은 인간 스스로에게 이로울뿐더러 궁극적으로는 자연을 보호하는 결과를 낳는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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