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Juhn Mun Apr 01. 2022

<프랑스 아이처럼> 파멜라 드러커맨

#프랑스아이처럼 #파멜라드러커맨 #북하이브 [평점 : 9.1 / 10.0]


미국인 기자인 파멜라 드러커맨은 세 아이의 엄마입니다. 본인은 미국인, 남편은 영국인이지만 프랑스에서 생활하고 있습니다. 세 아이도 프랑스에서 자라게 됩니다. 프랑스에서 육아를 하면서 미국의 아이들과는 다른 프랑스 아이들을 목도하게 됩니다. 아주 어릴 때부터 통잠을 자는 아이들, 식사시간에 소란을 피우지 않는 아이들, 4살이 넘으면 부모님 없이도 여행을 가는 아이들을 보며 프랑스 아이는 왜 다른지 의문점을 갖게 됩니다.


사실 프랑스 육아법이라고 해서 특별한 육아 철학 따위는 없었습니다. 그저 아이를 존중하고 한번 더 기다려주는 것뿐이었습니다. 그리고 적절한 규율 내에서 완전한 자율을 보장하는 것입니다. 몇 가지 사례를 정리해보겠습니다.


- 아이가 깨면 곧장 달려가지 않고 5분 정도는 지켜본다. 아이에게 잠깐 멈추기가 필요한 이유는 아이들은 보통 2시간 정도 지속되는 수면 사이클 사이에 잠깐잠깐 깨기 때문이다. 어른도 동일하다. 다만 어른은 다시 잠드는 법을 알고 있다. 아이는 아직 다시 잠드는 법을 모르기 때문에, 다시 잠드는 법을 배울 기회가 필요하다. 일어날 때마다 달래준다면 아이의 수면 사이클을 방해하는 것이고, 다시 잠드는 법을 배울 기회를 빼앗는 것이다.

- 다만 자지러지게 울 때까지 방치하라는 말이 아니다. 요구가 계속되면 달래고 먹여줘야 한다.

-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알아야 즐길 자격이 있는 존재임을 인정하고 가르쳐야 한다. 아이의 식사시간도 생후 몇 개월 후부터는 정해진 시간에 먹여야 한다.

-부모는 독재자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권위를 갖고 있어야 한다. 요점은 아이가 뭔가를 못하도록 막는 것이 아니라 뭔가를 할 수 있도록 권한을 주는 것이다.

-아이는 부모의 야심을 위한 도구나 프로젝트가 아님을 인정해야 한다. 아이들도 자신의 취향과 즐거움, 삶의 경험을 지닌 개별적이고 유능한 존재이다. 나이가 어릴 뿐 아이들의 존재를 존중해야 한다.


이런 내용들을 보면 사실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입니다. 다만 이와 반대되는 우리의 현실을 비교해보겠습니다. 아래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흔히 추구하는 육아법이지만 프랑스 아이처럼에 나오는 육아법에서는 지양해야 할 부분들입니다. 생각보다 다른 점이 많죠?


- 아이가 울면 안아준다 (vs 잠깐 멈추고 바라본다)

- 아이가 배가 고프면 언제든지 음식을 내어준다 (vs 식사시간을 지킨다)

- 아이의 이야기를 항상 존중하고 자율성을 강조한다 (vs 부모의 권위와 규칙을 요구한다)

- 아이의 미래를 위해 선행교육에 투자한다 (vs 아이는 부모의 프로젝트가 아니다)


비록 프랑스에선 지양하고 있지만 미국과 우리나라에서는 당연히 요구되는 부모의 덕목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아이를 위한 부모의 희생도 추가되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역시 육아란 어렵습니다. 정답이 없는 것 같습니다. 아직 경험해보지 않았으니 정말 어려울 것 같다가 맞는 표현이겠네요. 곧 다가올 아이를 위해 그리고 조금이라도 더 나은 아빠가 되기 위해 노력해야겠습니다.



알고 보니 특별한 부모가 되기 위한 육아 철학 따위는 없었다. 그들은 그저 ‘아이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 다르게 생각할 뿐이었다.


“아이를 기다리나요 Are you waiting for a child?” 언뜻 아이와 점심약속이라도 있냐는 질문인 줄 알았다. 알고 보니 프랑스에선 ‘임신했느냐?’는 말을 그렇게 표현한다고 한다.


중요한 것은 ‘뭐든 허용된다.’는 게 아니라 ‘침착하고 분별력을 발휘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와 달리 프랑스 엄마들은 거의 확실히 해로운 것과 감염이 되었을 때에만 위험한 것을 구별한다.


프랑스 부모라고 해서 당연히 아기가 태어나자마자 곧바로 밤을 할 거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생후 2~3개월이 되었는데도 아직까지 자다 깨다를 반복하게 되면, 그걸 참지 못하고 대체로 그 생활을 끝낸다. 프랑스 부모들은 밤에 깨어나는 것은 초기의 아주 일시적인 현상일 뿐, 아기의 특성과는 관계가 없다고 생각한다. 부모들 모두 최악의 경우라도 생후 6개월 이전에 밤새 잘 자게 되는 게 당연하다고 믿는다.


“가장 먼저 하는 조언은 아기가 태어난 직후 밤마다 칭얼대는 아기에게 곧장 달려가지 말라는 것입니다. 아기 스스로 마음을 달랠 기회를 갖도록, 반사적인 반응을 하지 말라는 것이죠. 출생 직후부터요.”


잠깐 멈추기가 필요한 다른 이유는 ‘아이들은 약 2시간 정도 지속되는 수면 사이클 사이사이에 깬다.’는 사실 때문이다. 아기가 이 사이클 사이를 연결시키는 법을 터득하기 전에는 어느 정도 칭얼대거나 우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부모가 이것을 배고픔이나 스트레스의 신호로 해석하고 곧바로 뛰어들어 아기를 달래준다면, 아기 스스로 수면 사이클을 연결시키는 방법을 배울 수 없게 된다. 다시 말해 각 사이클 말미마다 어른이 찾아와 달래줘야만 다시 잠이 들도록 ‘길들여지는’ 것이다.


물론 때때로 한밤중이라도 젖을 먹이거나 품에 안아야 할 때가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 전에 잠깐 멈추고 지켜봄으로써 정말 필요로 하는 게 있는지 아니면 단순히 사이클이 끝나서 그러는 건지 확실히 알 수가 있다. 코헨은 또 이렇게 썼다. ‘아기의 요구가 계속 지속된다면 당연히 먹여야 한다. 아기가 자지러지듯 울 때까지 방치하라는 말이 아니다.’ 그가 강조하는 것은 아기에게 배울 기회를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양한 연구 결과는 다음과 같은 지적을 한다. ‘밤에 자주 깨어나는 것은 대체로 아동기 불면증의 진단범위 안에 들어간다.’


‘잠깐 멈추기’나 ‘울리기’가 효과적이라는 걸 믿기 위해선, 우선 어린 아기조차 뭔가를 배울 수 있고 좌절에 대처할 수 있는 ‘인간’이라는 걸 신뢰해야 한다.


“그동안 빈이 우리를 깨워주고 있었나봐. 우리가 그래주기를 바란다고 생각했나봐.” 사이먼이 말했다.


여기서 ‘즐거움’이라는 말은 중요하다. 프랑스 부모는 아이가 쾌활해선 안 되고 군소리 없이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해야 한다고 여기지는 않는다. 단, 스스로를 통제할 줄 알아야 즐길 자격이 있다고 생각할 뿐이다.


첫째, 아기는 생후 몇 개월이면 매일 비슷한 시간대에 먹어야 한다. 둘째, 여러 번 조금씩 먹기보다 서너 번 많이 먹어야 한다. 셋째, 아기 역시 가족의 리듬에 맞춰가야 한다.


아침, 정오, 오후 4시, 저녁 8시의 일정이었다. 나중에 빈의 주치의에게 왜 진작 일정에 대해 말해주지 않았느냐고 물었더니, 미국 부모에게 수유 스케줄을 알려주면 너무 곧이곧대로 받아들여서 일부러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이 ‘미국식 질문’은 프랑스 부모들과 미국 부모들의 결정적인 차이를 압축해서 보여준다. 미국 부모들은 발달단계마다 아이들을 밀어붙이고 자극하고 이동시키는 걸 자신의 임무로 여긴다. 부모가 양육을 잘할수록 아이는 빨리 발달한다고 생각한다.


아이에게 세심하게 귀를 기울이되, 아이에게 세상을 설명해주어야 한다고 여겼다. 세상에는 많은 제한이 따르므로, 아이 스스로 그것을 합리적으로 흡수하고 대응할 수 있어야 한다고 말이다.


부모가 된다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이지만 부모라는 사실이 다른 역할까지 잠식해서는 안 된다는 게 프랑스 사회의 지배적인 메시지다. 파리에서 만난 여성들은 엄마가 아이의 ‘노예’가 돼서는 안 된다는 말을 자주 한다.


프랑스 여성이 일하는 이유는 경제적 안정만이 아니다. 그들은 지위 자체를 추구한다. 적어도 파리에서는 전업주부라는 위상이 그리 높지 않다. 프랑스에서 전업주부에 대한 이미지는 누구와도 말을 섞지 못하고 한구석에 꿔다놓은 보릿자루처럼 앉아 있는 모습이다.


사회학자 아네트 라로Annette Lareau는 백인이나 아프리카계 중산층 부모 사이에서 목격한 ‘집중양육’의 현실을 이렇게 꼬집는다. “이들은 자녀를 일종의 프로젝트로 본다. 일련의 조직활동, 집중적인 추론과 언어발달 과정, 교육기관에서의 경험을 세밀하게 관리 감독함으로써 아이의 재능과 기술을 한층 계발할 수 있다고 믿는다.”


물론 이 균형은 그저 이상일 뿐이다. 그러나 완벽해야 한다는 게 아니라 어느 한쪽이 좀 부족해도 좋다는 의미로 사용된다는 점에서 위안이 되기도 한다.


‘아이가 부부라는 우주에 침공해 들어와선 안 된다. 가족이 균형을 이루려면 부부만의 사적인 공간이 필요하다.’ 소아과 의사 엘렌 드 레스니데르는 자신의 책에서 강조한다


‘아이들과 음식’에 대한 프랑스식 접근방식을 요약해 보여준다. 한마디로 이것이다. ‘계속 시도하면 결국엔 좋아진다.’ 내가 만난 평범한 프랑스 부모들은 믿는다. ‘이 세상에는 엄청나게 풍요로운 맛의 세계가 존재하며, 아이는 그 세계를 만끽할 수 있도록 일찍부터 잘 교육 받아야 한다.’


프랑스 부모와 양육자들은 독재자처럼 보이지 않으면서도 분명한 권위를 갖고 있다. 이들의 목적은 복종하는 로봇을 키우는 게 아니다. 오히려 늘 아이 말에 귀를 기울이고 대화를 나눈다. 실제로 권위 있는 어른들일수록 아이에게 마치 종 부리듯 말하지 않고 오히려 서로 평등한 관계인 것처럼 말했다.


부모 권위의 요점은 아이가 뭔가를 못하도록 막는 게 아니라 뭔가를 할 수 있게 권한을 주고 인정하는 것이라고 한다.


아이들이 ‘자신의 삶을 살도록’ 하는 것은 거친 세상에 풀어놓거나 버리라는 게 아니다. 다만 아이는 부모의 야심을 위한 창고가 아니며 부모가 완수해야 할 프로젝트도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다. 아이들은 자신의 취향과 즐거움, 삶의 경험을 지닌 개별적이고 유능한 존재다. 심지어 자신만의 비밀도 갖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한 권으로 끝내는 미국 주식>소몽(홍승초)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