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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hn Mun Dec 23. 2018

<호모데우스> 유발하라리

 사피엔스는 신이 될 수 있을까?

수렵 채집 시절의 인류는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었다. 자연의 일부이고 다른 종들과 수평 한 존재였다. 하지만 ‘신’과 인간의 특별한 계약으로 인류는 세상을 정복했다. 신은 인간을 집단으로 행동하게 만들었고, 현재의 고통을 내세의 영광으로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으며,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많은 현상을 설명할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다. 기술적으로 서술해 본다면, 인류를 효율적으로 움직이게 만드는 최선의 알고리즘은 ‘신앙에 의한 믿음’이었다. 그렇게 과거의 인류는 기아, 역병, 전쟁을 이해하고 설명해왔다.


현대의 인류는 기아, 역병, 전쟁을 사실상 해결했다. 더 이상 이 문제들을 신의 탓으로 돌리지 않기 때문이다. 과학적인 방법으로 인과관계를 찾고, 이 문제들을 해결해왔고 앞으로 해결해 나갈 것이다. 인류는 더 이상 신에게 답을 구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그 답을 찾았다. 그리고 더 이상 신을 ‘신격화’하지 않는다. 이렇게 현대의 인류를 움직이게 만드는 최선의 알고리즘은 변했다. ‘신앙에 의한 믿음’이 아닌 ‘인간에 의한 자의식’이 그 자리를 대체하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는 냉전시대의 종말이 자유주의의 완승으로 끝난 것이다. 사회주의는 인간들을 움직이기 위한 알고리즘을 중앙집권화 했다. 반면 자유주의는 인간들 개인의 자의식에 의한 선택으로 알고리즘을 구성했는데, 하나의 자의식의 실패는 또 다른 자의식의 발현으로 그 실패를 바로 극복할 수 있는 장점이 있었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중앙집권화된 알고리즘의 실패는 그 사회에 치명적이었으며, 누적된 결과 자유주의에 굴복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면 현대 인간의 자의식에 의한 알고리즘은 미래에도 유용할까? 유발하라리는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인류는 이미 신에 도전하고 있다. 기아,역병, 전쟁이라는 사피엔스의 근원적 숙제를 해결하고, 불멸과 행복이라는 신의 영역에 도전하고 있다. 불멸은 신체적 업그레이드하는 방법을, 행복은 뇌를 이동하는 전류의 흐름을 연구 과학을 통해 계속해서 도전 중이다.


특히 행복이라는 감정, 인간이라는 자의식이라는 감정에 대한 유발하라리의 생각에 눈길이 간다. 이런 행복과 자의식은 인간만이 느낄 수 있는 감정은 아니다.충분한 연구 결과로 우리가 곁에 두는 개와 고양이 같은 애완동물, 그리고 수많은 야생포유류들도 이러한 감정을 갖고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다. 그렇다면 우리가 사육장에 가두고 키우는 닭, 돼지, 소의 행복과 자의식은 인간은 왜 무시하는가?만약의 행복의 감정이 단순 전류의 흐름으로 인한 결과는 아닐까? 단순 전류의 흐름으로 생기는 행복과 자의식이라면,특별한 게 없지 않은가? 전류의 흐름을 제어할 수 있는 알고리즘이 있다면 인간의 행복과 자의식보다 그 기술적 알고리즘이 떠 중요한 게 아닌가?


여기서 만약 그러한 알고리즘이 존재한다면 인간중심적인 사고는 전파를 조정하는 알고리즘에 의해 대체될 것이다. IOT와 같은 데이터 기반의 알고리즘이 모든 정보를 수용하고, 지금과는 상상할 수 없는 데이터 처리능력을 갖추게 된다면 인간의 자의식은 인류 발전에 효율적인 알고리즘이 아니게 될 수도 있다. 지금의 신앙이나 종교적 의식처럼 구시대의 유물이 될 가능성이 매우 높으며, 또는 지금의 우리 인류가 도구로 이용하는 가축들처럼 인류가 알고리즘의 도구가 되지 말란 법은 어디에도 없다.


이런 유발하라리의 굉장히 반사회적이고 도전적인 질문에 나는 한 인간으로써 걱정은 크게 되지 않는다. 이유는 그러한 과학과 사회의 발전이 한 세대에 이루어 지기는 쉽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적어도 내가 살아가는 생애에서 데이터 기반의 알고리즘이 인간의 자의식 기반의 알고리즘을 대체하긴 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한다. 굉장히 이기적인 판단이지만 사실일 것 같다. 하지만 인류의 미래는?

나 같은 개인의 이런 무지한 사고와 무관심이 데이터에 의한 알고리즘을 더 강화 할 것이고, 언젠간 인간의 자의식 기반의 알고리즘을 대체하게 될 것이다. 무섭고 비관적인 이야기지만 그럴 가능성이 없지 않다는 두려움은 충분히 느껴야 한다.그러면서 나라는 인간은 내 인생에 대한 비관을 가질 필요는 없지만, 인류 변화를 촉구하기엔 나라는 개인은 또 너무 작은 존재이다. 나라는 인간은 어떻게 될까?인류는 그럼 어떻게 될까? 어렵고 고민스러운 질문들이다.


어서 빨리 21가지 제언을 읽어 보고 싶다. 다음 책에는 해답이 있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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