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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hn Mun Apr 06. 2020

<어떻게 죽을 것인가> 아툴 가완디

Death with dignity

2019년 8월 17일은 어느 날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토요일이었다. 조금 다른 점이 있었다면 날씨가 너무 좋았다는 점 정도? 나는 그때 한강에 나가 돗자리를 펼쳐 놓고 편히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한편에선 큰 폭죽놀이가 있어 한참을 멍하니 구경한 건 어느 날과는 조금 달랐던 건지도 모르겠다.


갑자기 전화를 받은 건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쉬고 있을 때였다. 아무 말도 않고 다급한 목소리로 빨리 집으로 오라는 전화. 인천에 살고 계시는 아버지의 전화였다. 아름다워 보이기만 하던 폭죽놀이가 섬뜩한 색으로 기억에 남은 건 그때부터였던 것 같다.


급하게 차를 몰아 인천의 한 병원에서 만난 아버지는 넋이 나가 계셨고 여동생은 흐느끼고 울고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지난 지 모르겠지만 담당 의사는 보호자를 찾았고 난 그를 만났다. 그는 덤덤히 말을 이었고 나는 어떤 반응도 할 수 없었다. 한쪽에선 아버지와 여동생의 오열 소리가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터져 나왔고 그 의사의 뒤편으로는 차가운 병원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힘들게 내가 입을 땐 첫마디는 짧았다.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나요?”


그렇게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언젠간 다가올 줄 알았지만 아주 멀리 있는 것만 같아 새삼 느끼지 못한 죽음이 내 삶에 들어오기 시작한 건 그 날 이후부터였다. 어떻게 죽을 것인가? 어머니께서는 그때 어떤 생각을 하고 계셨을까? 어머니를 그렇게 떠나보낼 수밖에 없었던 나는 무슨 죄를 지은 걸까? 아버지는 어떤 마음일까?


죽음이 내 삶에 자리 잡은 이후부터는 죽음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게 됐다. 내 장례식엔 누가 올 것이며 재산은 어떻게 나눌 것이며 어느 납골당에 안치할 것이지 신체 기부는 할 것 인지에 대한 고민들이었다. 하지만 아툴 가완디의 ‘어떻게 죽을 것인가’를 읽으며 이런 죽음에 대한 고민은 현실을 외면하는 고민들임을 알게 되었다. 저런 고민들은 죽음 이후의 문제들이다. 죽음을 마주하는 과정의 문제가 아니다. 죽음은 고귀하나 과정은 결코 쉬운 길이 아니기 때문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병원에서 죽음을 맞이한다. 죽음을 선고받았으나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현대의학에 의존하기 때문이다.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수술을 하고 고통을 참아내며 방사능 치료, 화학치료 등 할 수 있는 모든 의료기술과 수많은 기기에 신체를 맡긴다. 우린 그렇게 병원에서 생명을 연장한다. 당사자의 이전의 삶은 더 이상 중요하지 않은 채 오로지 생명 연장에만 집중하게 된다. 생명을 연장하기 위해 삶을 포기하는 것이다.


여기서 그 누구도 잘못한 사람은 없다. 의사는 환자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환자의 가족들 역시 물심양면으로 도왔다. 도움을 떠나 환자의 의사와 가족들이 그 반대의 선택을 했다면 그것은 살인이나 다름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런 병원에서의 생활이 지속된다면, 환자의 삶보다 생명연장이 우선시되는 시간이 계속해서 이어진다면 이는 다른 문제로 봐야 한다. 죽음을 맞이하는 본인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다. 삶을 잃어버린 생명은 어떤 의미가 있을 것인가?


나 또한 죽음이 내 삶에 자리 잡은 이후부터 현대의학에 더 의지하게 되는 것 같다. 어머니를 보내드린 이후로 아버지와 장인 장모님의 건강검진을 예약했다. 더 이상 이런 대비 없는 죽음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어떻게 해서든 죽음을 피하고 싶다는 두려움과 그래도 난 이런 노력이라도 했다는 스스로에 대한 면피를 위해 한 행동일지도 모르겠다. 이런 죽음의 대한 나의 행동들은 죽음을 마주하는 그들보다는 죽음을 지켜봐야 하는 나의 감정에 충실한 대응들이기 때문이다. 철저히 이기적인 태도다. 나는 죽음을 마주하는 자들의 존엄에 대해 고민이 부족한 현대 의학과 같았다.


우리는 한 개인의 존엄과 삶을 마무리할 권리, 원하는 대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자율에 대해서 고민해볼 필요가 있다. 죽음을 마주하는 사람에게 의학적으로 생명을 연장하고 안전만을 보장하는 것이 과연 맞는 선택인지 모르겠다. 어떤 것도 도와줄 수 없는 이들의 죄책감을 덜어주기 위한 방법은 아닐까? 특히 본인이 죽음을 마주할 준비가 됐을 경우는 또 달라야 하지 않을까?


죽음에 대해선 그 어느 누구도 가벼울 수 없다. 하지만 현대의학의 발전으로 삶과 생명이 달라진 지금, 삶의 죽음과 생명의 죽음을 언제까지 분리해서 봐야 할지 생각해 볼 여지가 있을 것 같다. 안락사(Assisted Suicide)가 아닌 존엄사(Death with dignity)에 대해 고민해 봐야 할 때이다.





P.119 앨리스 할머니는 사생활과 삶에 대한 주도권을 모두 잃었다. 병원 환자복을 입고 지낼 때가 대부분이었다. 직원들이 깨우면 일어나고, 목욕시켜 주면 하고, 옷을 입혀 주면 입고, 먹으라고 하면 먹었다
P.157 연구 팀의 표현을 빌리자면 “생명의 덧없음을 두드러지게 느낄 때”면 삶의 목표와 동기가 완전히 변한다. 가장 중요한 것은 나이가 아니라 관점인 것이다.
P.166 그들은 삶에서 할아버지에게 가장 중요한 관계와 기쁨을 어떻게 하면 유지할 수 있을까에 대해서는 생각해 보려 하지 않았다. 그들의 태도는 잔인함보다는 몰이해에서 나오는 것 같았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말했듯, 그 둘이 결국 뭐가 다르겠는가?
P.231 노화나 질병으로 인해 심신의 능력이 쇠약해져 가는 사람들에게 더 나은 삶을 제공하려면 종종 순수한 의학적 충동을 제한할 필요가 있다. 너무 개입해서 손보고, 고치고, 제어하려는 욕구를 참아야 한다는 뜻이다.
P.319 그러나 자신의 삶이 언제라도 깨질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은 후부터는 삶에 대한 초점이 좁아지고, 욕구에도 변화가 생겼다. (중략) 아버지는 손주들을 더 자주 찾아봤고, 특별히 시간을 내 인도로 날아가 친척들을 만났으며, 새로운 일을 벌이는 걸 줄였다.
P.371 보통 우리는 안락사 Assisted suicide라고 말한다. 이 개념을 지지하는 사람들은 존엄사 death with dignity라는 표현을 더 선호한다. 오늘날 우리는 벌써 이 권리를 일부 인정하고 있다.
P.373 네덜란드인 사망자 35명 중 1명이 안락사를 선택한다는 사실이 성공을 가늠하는 척도가 될 수는 없다. 그것은 실패의 척도다. 결국 우리의 궁극적인 목표는 ‘좋은 죽음’이 아니라 마지막 순간까지 ‘좋은 삶’을 사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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