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Hoho Jan 11. 2022

젖소는 날 때부터 젖소가 아니다

채식과 윤리


 젖소는 날 때부터 젖소가 아니다. 인간과 똑같이 소가 젖을 짜려면 임신을 해야 하고, 그 젖은 당연히 송아지가 먹어야 하지만 송아지는 당연히 태어나자마자 어미와 격리가 되고 젖소는 인간을 먹이기 위한 젖을 짠다. 무려 송아지가 먹는 젖의 10배나 많은 젖을. 그러다 보니 당연히 몸이 축나고 영양소도 부족해지고 건강이 빠르게 나빠지는데, 그 끝에는 도살이 기다리고 있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사실을, 과거의 나는 당연히 인간이 먹을 우유를 생산해주는 젖소가 따로 있다고 생각해왔다. 소의 삶에 대해서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비건들이 식탁에서 고기를 보는 것도 냄새를 맡는 것도 싫어지는 그런 마음과, 육식인들이 봤을 때 비건들은 예민하고 극단적이라는 생각. 양쪽 모두 자연스러운 흐름이다. 그 입장에 서서 보면 이해가 간다.


 채식을 결심한 사람들은 그간 너무 당연시해왔던 육식의 현실을 마주한 순간 사람이 이렇게나 잔인하고 극악무도할 수 있고, 이렇게 자본이 양심을 짓밟아버릴 수가 있다는 사실을 마주한 순간 그것들이 가히 충격적이라서, 여태껏 괜찮다고 믿었던 것들이 너무나도 잔인하고 사랑하는 동물들이 그런 대접을 받는게 슬퍼서, 그간 내가 이런 고기를 먹어왔구나 하는 생각에 오랜 시간 쌓아왔던 도덕성이 완전히 무너져버려서 그렇게 비건을 결심하게 되고 이걸 알고도 육식을 하는 사람들이 있고 심지어는 그것을 숨겨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에 배신감이 매우 클 것이다. 육식주의에 내재하는 엄청난 고통을 직시할 때 누구든 무력감과 좌절감을 느낄 수 있다. 참 슬픈 현실이다.


 하지만 그저 남들과 같이, 관성대로 잘 살아왔던 사람들에게 갑자기 채식을 얘기하고 육식이 나쁘다는 것을 설명하기는 참 어렵다. 인간의 3대 욕구 중 하나인 식욕과 삶의 3대 필수요소 중 하나인 음식은 우리 인생에서 빼놓을 수 없는 요소이기 때문에, 내 어린시절 모든 추억과 현재의 행복을 차지하는 그 맛이 나쁘다고 말하는 사람들에게 거부감이 생기는 것은 당연하고, 채식을 강요한다는 건 다른 의미에서의 폭력으로 보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뭐가 맞느냐에 대한 논쟁을 벌이기 전에 일단 우리 눈 뒤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확실하게 봐야할 필요가 있지 않을까?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입을까’ 중에서


 확증편향이라는 심리학 용어가 있다. 새로운 정보를 들었더라도 자신의 가치관, 신념, 판단 따위와 부합하는 정보에만 주목하고 그 외의 정보는 무시하는 사고방식이다. 한마디로 보고싶은 것만 본다는 것이다.


 나치에 침묵한 사람들, 제국주의에 무릎을 꿇은 사람들, 육식주의가 숨기는 끔찍한 폭력성을 목격하고도 무시하는 사람들. 모두 현생의 안정성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교육을 통해서 배우는 도덕성에 반하는 본능이다. 동물적 본능은 권력에 하고, 생을 택한다. 인간은 도덕과 윤리를 배우고 사회화를 거쳐 지배적인 존재가 되었다.  도덕적 관념은 사회가 발전하면서 진화한다.


 우리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오른 지금, 이제는 보기 싫은 현실도 똑바로 봐야할 필요가 있다. 우리의 도덕성이 무너질 것이 염려되어 진실을 마주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다면, 그것 또한 대량학살이 일어나는 것을 어렴풋이 알면서도 더 알아가기를 포기한 ‘선택’이라고 할 수 있다.


 비건을 하기로 결심한 이후, 보기 싫었던 도축 장면을 생생하게 담은 다큐멘터리 '도미니언'을 일부러 봤다. 보는 내내 너무 힘들었고, 눈이 감겼다. 눈물이 났다. 죄책감이 들었다. 부끄러웠다. 다음엔 화가 났다. 왜 이제서야 알았지? 왜 아무도 이야기해주지 않았지? 왜 한 번도 생각해보지 않았지? 대체 왜? 나의 도덕성에 큰 혼란이 오는 순간이었다. 이후, 빨간 고기를 보는 순간 그것은 더 이상 음식이 아니었다. 피로 물든 잔인함의 상징이었다. 우유를 얻기 위해 강제임신을 당하는 여성 소의 고통을 알게 된 이후, 유제품은 나에게 음식이 아니었다. 약자에 대한 강자의 착취이자 폭력이었다. 같은 땅에서 같은 공기를 마시며 살아가는 생명들의 운명을 감히 인간이 결정지을 수 있을까? 


나는 육식주의의 폭력성에 가담하지 않기를 선택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